여성 잔디박사1호 태현숙씨 "눈뜨면 골프장行…왜?잔디보러"

  • 입력 2002년 12월 15일 17시 35분


캐디나 프로 골퍼도 아니면서 1년에 200일 이상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골프장 잔디를 밟고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박사학위까지 딴 여성이….

삼성에버랜드 안양베네스트컨트리클럽 잔디환경연구소의 태현숙(太賢淑·32) 박사. 그는 잔디가 겨울잠 잘 때를 제외하고 봄 여름 가을이면 골프장 필드에서 잔디를 연구한다. 그래서 희고 고왔던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거칠어졌다. 태 박사가 직업 때문에 겪는 고충은 이뿐만이 아니다. 골프장 안에서 잔디 실험을 하다가 라운딩하는 골퍼들에게 ‘봉변’을 당할 때도 종종 있다.

“골퍼들이 플레이에 방해가 됐는지 저한테 다가와 화 난 목소리로 ‘아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라며 무섭게 따질 때가 있어요.”

이 때마다 태 박사는 골퍼들이 마음 놓고 골프를 할 수 있도록 잔디에 농약을 적게 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대부분은 “아∼, 예. 좋은 일 하시네요”라면서 웃으며 돌아간다.

태 박사가 잔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1995년 봄 경북대 농학과 대학원의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중 같은 과 후배가 “잔디환경연구소에 지원하는데 같이 가자”며 두 장의 입사원서를 가져왔다. 하지만 결과는 엉뚱하게도 태 박사는 합격하고 후배는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는 생소한 잔디 연구에 매달렸고 지난해 12월 한국의 골프장에서 자라는 외래종 잡초 ‘새포 아풀’을 친환경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땄다. 잔디 분야 국내 여성 박사 1호가 된 것이다. 농약을 적게 쓰면서 잔디를 관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태 박사의 몫이다. 7월 아카시아잎에서 잔디잡초가 싹 트는 것을 억제하는 물질을 추출해 물질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그는 국내에서 생소한 잔디 연구를 ‘천직’(天職)이라고 여긴다.

“국내에서는 저 혼자뿐이지만 외국에서는 잔디를 연구하는 여성들이 골프장뿐만 아니라 잔디 축구장 관리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어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잔디 연구는 정말 도전해 볼 만한 분야예요.”

골프장에서 7년7개월을 보낸 그의 골프 실력이 궁금했다.

“지금까지 10번 쳤나요. 아마 120타는 될 거예요.”

이호갑기자 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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