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의 고향을 찾아서]<9>中 백록동서원과 주자학

  • 입력 2002년 12월 1일 18시 25분


주희와 육구연이 제자들과 함께 학문의 길을 논하던 백록동서원은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싱쯔〓김형찬기자 khc@donga.com

주희와 육구연이 제자들과 함께 학문의 길을 논하던 백록동서원은 고풍스러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싱쯔〓김형찬기자 khc@donga.com

“요즘 사람들은 의리(義)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利)을 위해서 책을 읽는다. 그렇게 책을 읽어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오르기를 원하고 한 번 관직에 오르면 또 더 높은 관직을 바라니, 젊어서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책을 읽는 것은 오직 이익을 위한 것뿐이다….”

주희(朱熹·1130∼1200)는 자신이 재건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 육구연(陸九淵·1139∼1193)이 찾아오자 그에게 학생들을 위한 특별강연을 부탁했다. 육구연은 ‘논어’의 ‘이인편(理仁篇)’에 나오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는 구절을 가지고 주희의 학생들 앞에서 이런 내용의 강연을 했다. 당시 세간에서 학문하는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비록 두 사람의 학문적 입장은 서로 달랐지만 학자가 가야 할 길은 다를 것이 없었다. 육구연이 열변을 토하는 강의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대에 쌍벽을 이루던 두 사람이 학문의 길을 논했던 백록동서원은 장시(江西)성 싱쯔(星子)현 북쪽의 여산 오로봉(廬山 五老峯) 밑에서 고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관광지로 ‘꾸며지지’ 않았고 10여채나 되는 옛 건물들이 그 시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거닐었을 돌다리며 그들과 학생들이 마주앉아 학문을 논했을 돌 탁자도 서원 앞 계곡을 바라보며 옛 기억을 되뇌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이미 6년 전(1175) 장시성 옌산(鉛山)현의 아호사(鵝湖寺)에서 정면 충돌을 한 적이 있었다. 경전에 대한 엄밀한 학습과 사물 하나하나에 대한 반성을 공부 방법으로 제시했던 주희와 자신의 마음에 모든 이치가 담겨 있다며 내향적(內向的) 반성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육구연의 생각은 쉽게 융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주희는 “남송 시대에 들어서 근본을 다지며 착실히 학문과 씨름한 것은 나와 육구연뿐”이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고, 육구연 역시 백록동서원을 찾아와 타계한 형의 비문을 주희에게 청할 정도로 주희를 존중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동아시아의 철학사를 풍요롭게 한 소중한 것이었지만, 이 시기는 아직 주희의 시대였다. 육구연이 개창한 심학(心學)은 다음 세대의 왕수인(王守仁·1472∼1528)을 기다려야 했다.

주희의 생가 자리에 있는 남계서원에서는 주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우시〓김형찬기자 khc@donga.com

불교국가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수와 당이 힘없이 무너져 가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출세간의 깨달음을 추구했던 불교를 현실을 무시한 외래사상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고 불교를 대치할 중국인의 사상을 찾았다. 이때 이들이 찾은 것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었지만 불교의 치밀한 존재론에 비해 이들의 유학은 너무도 소박해 보였다. 한유(韓愈), 이고(李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