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작가 김학철 비운의 삶 기린다

  • 입력 2002년 9월 24일 18시 28분


고 김학철옹
고 김학철옹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고 인간답게 살려거든 불의에 도전하라.’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으로 항일독립투사이자 소설가인 김학철(金學鐵·1916∼2001)옹은 이같은 유언을 남기고 지난해 9월 25일 중국 지린성 옌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1주기를 맞아 25일 오후 2시반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실에서도 추모의 모임 및 ‘20세기 중국조선문학사료전집’(김학철문학편) 출간기념회가 열린다.

또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는 김씨와 중국 작가 딩링(丁玲·1904∼86)의 뜨거운 동지애와 우정을 보여주는 편지도 처음 공개한다. 딩링이 1970년대에 김씨의 아들 해양씨(54)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그는 원래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불구자가 되었는데 어쩜 중국에서 또 감옥살이를 해야 하다니, 그것도 한 권의 미발표 소설 때문에. 참 들을수록 사람을 격분시키고 참을 수 없게 만드는구나”라고 썼다.

항일 독립투사이자 소설가인 김학철옹의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그의 유골을 두만강을 따라 고향으로 흘려보냈다.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던 그는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조선의용군 활동을 하다 일본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일본 감옥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 월북했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험난한 한평생을 살면서도 지사다운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그는 삶의 끝자락도 아름답게 매듭지었다. 주변에 자신의 유서를 알리고 눈감기 20여일 전부터 곡기를 끊어 자신의 죽음을 준비했다. 그는 이 유서에서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고 썼다.

또 장례식과 관련해 “부고를 내지 말라. 유체 고별식과 추도회를 일절 하지 말라. 골회(유골)는 두만강 하류에 뿌리고 남은 것은 우체국에서 우편용 종이 박스를 구해 여기에 담아 두만강 물에 띄워 고향 원산으로 가게 하라”고 요청해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02-332-0639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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