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인터뷰]22일 종영 '여인천하' 김재형 PD

  • 입력 2002년 7월 15일 18시 34분


《SBS 사극 ‘여인천하’가 22일 150회로 끝난다. 지난해 2월부터 최근까지 평균 시청률 32.3%(TNS미디어 코리아 조사)를 기록한 ‘여인천하’는 조선 중종 때의 권력 투쟁을 여인 중심으로 농밀하게 그려낸 화제작으로 사극의 중심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환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극 제작 경험이 일천한 SBS에서는 “사극 연출의 큰 밑천을 얻었다”고도 말한다.

‘용의 눈물’에 이어 ‘여인천하’를 통해 다시한번 자신의 ‘독보적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한 드라마 사극의 대부 김재형 PD(66). 벌써 차기작으로 내정된 ‘왕의여자(가제)’ 구상에 골몰하고 있는 그는 “기관차는 달려야 녹슬지 않는다”며 지칠줄 모르는 의욕을 보인다.

인터뷰 직전 그는 윤세영 SBS 회장과 점심을 함께 했다. 아무리 ‘왕PD’라고 해도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방송사 오너와 점심을 하다니. 하지만 김 PD는 “정장이 불편하니까”라고 짧게 말할 뿐 개의치 않았다. 》

“KBS에서 그 무섭다던 이원홍 사장 때도 ‘연출을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국장을 맡았지. 홍두표 사장한테는 PD 정년은 ‘방송판 고려장’이라고 고언도 했고. PD 후배들에게도 누차 월급쟁이의 근성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래도 극중 긴장 구조를 잘 만들어내는 흥행사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연출 현장을 지키게 된 것도 그 덕분이 아닌가요.

“60년대 동양방송(TBC)시절 방송의 비즈니스적 측면을 일찌감치 익혔죠. 16년 상업 방송의 경험을 통해 시청률 경쟁의 노하우를 얻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아요. 그래도 촬영장을 떠나면 사는 재미가 없다는 게 가장 현장이 절실했던 이유요.”

-KBS ‘태조 왕건’을 준비하던 중 캐스팅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일로 도중 하차한 뒤 SBS에서 연출 제의를 받았는데요.

“개인적으로 절박했습니다. 그 나이에 망신당하고. 명예를 회복해야 했어요. ‘여인천하’를 맡은 뒤 하루도 발뻗고 잔 적이 없어요. 아까 점심때 윤회장이 ‘한사람의 진정한 장인을 봤다’고 말하셨는데 지난 17개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갑디다.”

새벽까지 이어진 ‘여인천하’ 촬영장에서도 김 PD의 소리는 늘 쩌렁쩌렁했다. 어떤 연기자들은 “나이를 거꾸로 먹나 보다”며 경원시했다.

인터뷰때도 내내 줄담배. 그래도 건강은 이상이 없다고 한다.

“건강 검진에서 몸은 30대 초반이랍니다. 비결요, 현장에서 정신없이 일하는 것이죠. 체력은 타고 났어요. 장수 집안이기도 하구요.”

그는 골프를 치지 못한다. 방송사 간부들이 여러 차례 권했으나 “시간 그렇게 많아”라며 오히려 그들을 나무랐다.

‘여인천하’의 캐스팅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췄다. 강수연(난정) 최종환(중종) 도지원(경빈) 전인화(문정왕후) 등의 발탁은 의외였다. 특히 강수연은 흥행을 위한 ‘스타 플레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김 PD는 이 점에서 단호했다.

“스타를 좋아하지 않아요. 난정은 강수연이 ‘적확’했기 때문에 발탁했어요. 전인화의 카리스마도 마찬가지고. 이 두사람 빼고 스타 있으면 내기 합시다.”

도지원에게는 세 번을 찾아갔다.

첫 제안에 도지원이 “그런 악역은 못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번을 더 만나 “네 연기 속에 악녀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설득했다. 김 PD의 눈을 정확했고 도지원은 “뭬야” 등 유행어를 낳으며 중반 시청률을 이끌었고 연기의 폭도 넓혔다.

-‘이 나이에 연기자를 몇 번씩 찾아가야 하나’는 생각도 있었을텐데요.

“천만에요. 나는 ‘연기 재능’을 구했지 ‘도지원’을 구한 게 아닙니다.”

-배우 스스로도 모르는 연기를 어떻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평생 사극만 300편 넘게 봐보세요. 연기자만 보면 해당 배역이 떠오릅니다. 내 머리는 요, 사극 캐스팅의 데이터베이스(DB)입니다. 감독은 연기자의 ‘천의 얼굴’을 간파하고 있어야 해요.”

-9월 부산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공연 총감독을 맡았는데 ‘욕심’이 많으신 거 아닌가요. 더구나 개막 공연은 드라마와 다른데요.

“그렇지요 않아요. 젊었을 때 연극 연출을 해 본 경험도 많고.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다시 ‘현장’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그는 한국 TV 사극의 원조다. 1962년 KBS에서 PD로 출발한 이래 6년여만 빼놓고 34년간 사극만 연출해왔다. 1962년 그의 ‘국토만리’가 한국의 첫 TV 사극. 이후 그는 ‘사모곡’ ‘왕조의 세월’ ‘왕도’ ‘한명회’ ‘용의 눈물’ 등을 연출했다. 사극 작가 신봉승씨도 김 PD를 만나기 전에는 사극을 쓴 적이 없다.

-왜 평생 사극입니까.

“우리 역사는 찬란했습니다. 선비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고 군신과 주종간의 신의도 넘쳐납니다. 이처럼 역사의 덕목과 교훈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한(恨)의 정서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경영해온 왕들에게서 웅혼한 역사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극적 재미를 넣다보니 역사 왜곡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야죠.”

답변이 길었다. 가장 많이 받았을 법한 질문인데도 그는 가장 길게 이야기 하고 싶어 했다.

“현대극도 연출해봤지만 만나고 헤어지고 울고 불고, 그 틀이 전부예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여인천하’는 여성 취향이어서 선굵은 김 PD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KBS와 MBC의 ‘틈새’를 노려 궁중 여인의 이야기를 골랐습니다(이 말을 받아 흥행사답다고 했더니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난정이나 문정왕후는 피비린내는 권력 투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셈입니다. 생존 투쟁이 곧 권력 투쟁이었던 셈이죠. 어떻게 보면 내 스타일이 망가지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대롭니다.”

-남북 합작 드라마 ‘연개소문’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빨리 해야죠. 내 연출 인생의 지상 목표예요. 2년전에 북한에서 협의까지 했는데, 거 남북의 합(合)에 웬 걸림돌이 이렇게 많은지. 아무튼 일흔 때는 할 수 있겠죠.”

그는 부인(임선순씨)과 신혼 여행외에 단둘이 여행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저는 장가를 가장 잘 간 사람이고 아내는 시집을 가장 못 간 사람이요. 아이들도 ‘아버지가 입학이나 졸업식에 한번 온 적 있느냐’며 서운해합디다. 그런데 두 아들(창남·두만)이 영상 관련 직업을 가진 걸 보면 날 이해한 것 같아요.”

창남씨는 방송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고 두만씨는 CF 감독이다.

김 PD는 “아버님도 아나운서를 하시다 그만두고 공직 생활을 하셨다”며 “핏줄은 어쩔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달 하순경 한달 예정으로 TV 사극이 한국보다 앞선 일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프로덕션 등을 돌아볼 계획이다.

다음 준비중인 사극은 ‘왕의 여자’에 대해 “제목은 명쾌한데 또 여자라서 어떨지 모르겠다”며 슬쩍 떠보았더니 그는 씩 웃기만 했다. 자신이 있다는 태도였다.

허엽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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