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빅토르 위고, 프랑스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 입력 2002년 2월 19일 17시 35분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돌아왔다.

1870년 9월5일 19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에 돌아온 위고는 파리 북역에 운집해 “빅토르 위고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민 여러분, 나는 떠날 때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132년이 지난 2002년 위고는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화려하게 ‘컴백’했다. 1월7일 개학한 프랑스 초 중 고등학교의 새해 첫 수업이 모두 위고의 작품으로 시작된 이후 올 한해 거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가 프랑스 전역에서 열린다.

프랑스 상원은 빅토르 위고 탄생 200주년 기념일(26일)에 앞서 20일 특별 담화를 발표한다. 상원의원을 지내며 정치인으로도 두각을 나타냈던 위고를 기리기 위해서다.

올해는 특히 유로화 도입으로 위고의 이상이었던 유럽 통합과 단일통화 구축이 결실을 이룬 해여서 탄생 200 주년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위고는 의원시절 “유럽은 한 민족이며 한 가족이다. 유럽 합중국이 되자”고 주창했었다. 또 “유럽대륙은 돈은 한가지여야 한다”며 유로화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작가 위고보다 오히려 정치인 예언자로서의 위고를 더 평가하는 분위기. 르몽드 지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활동과 역할을 했던 위고의 어느 측면을 기념할 것인가”라고 자문하고 “단연 정치인으로서의 위고가 앞선다”고 답했다.

20일 담화를 발표할 크리스티안 퐁슬레 상원의장은 기자에게 “위고같은 걸출한 인물이 우리와 같은 상원의원이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프랑스 민중이 양심이자 희망이었던 위고의 박애주의 인도주의 사상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했다.그는 “19세기 후반을 밝게 빛낸 위고의 사상은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 가치로 계승됐으며 이는 다시 내일의 새로운 프랑스 구성의 토대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고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강조했다.

알렝 델캉 상원 사무총장도 “위고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 작가라는 점을 뛰어 넘어 그의 자유와 평등, 사회변혁 사상이 프랑스 정체성의 상징이자 혁명 정신의 표상”이라고 설명했다.

너무나 많은 분야에서 활약했던 위고였기에 기념행사 또한 다채롭고 풍성하다. 우리에게 ‘노트르담의 곱추’로 알려진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의 무대가 됐던 노트르담 성당에서는 종지기 콰지모도가 비척거리며 걸어다녔을 법한 종루의 구석구석을 개방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사형제 반대의 선구자였던 그를 기리기 위해 ‘위고와 사형제도’라는 제목의 세미나도 열린다.

놀라운 일은 이 모든 행사들이 국가 또는 특정 단체가 주도하거나 조직하지 않았다는 점. 지난 해 구성된 ‘위고 탄생 200주년 국가 위원회’는 국가 차원의 전시회 등 조직적인 행사는 갖지 않기로 결정했음에도 프랑스 전역에서 우후죽순식으로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렌 프라 위고 200주년 위원회 대변인은 “위고 관련 행사가 마치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들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위고에 열광할까. 평생을 자유와 약자 보호를 위해 싸웠던 위고의 사상이 프랑스 공화국의 이념과 맞닿아 위고를 단지 작가나 정치인으로보다는 ‘국가 영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카트린 타스카 프랑스 문화공보부 장관은 “우리는 위고에게서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가치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같은 ‘위고 사랑’은 ‘위고 특수(特需)’까지 만들고 있다. 올해만 위고 관련 서적 100여권이 쏟아져 서점가에는 별도의 위고 코너가 생겼을 정도. 르 피가로 지가 만든 위고 특집판은 6유로(약 7000원)나 되는데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노트르담의 곱추'로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의 무대가 된 노트르담 성당.
두개의 타워 중 오른쪽이 종탑

안식년 휴가차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이건우 서울대 교수는“국가나 특정단체가 조직적으로 추진하지 않아도 다양하고 풍부한 행사를 일년내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문화대국 프랑스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런 위고의 문학은 프랑스를 넘어 전세계인 앞에 ‘현재형’으로 언제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1905년 ‘파리의 노트르담’을 토대로 제작된 ‘라 에스메랄다’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68편에 달하는 영화와 TV시리즈로 제작됐다. 1956년 앤소니 퀸 주연으로 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은 특히 전세계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같은 소재가 1996년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으로 탈바꿈되기도 했다. 클로드 미셀 쇤베르크가 런던에서 뮤지컬로 제작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1987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이래 15년째 장기공연중이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 재불 언론인 이사빈씨 "정치인 위고, 통합-관용의 사상 펼쳐"

1840년대 중반 프랑스에는 오늘날의 상 하 양원과 비슷한 제도가 있었다. 하원에 해당하는 국민대표 의회는 국민 선거로 선출됐다. 왕이 임명하는 ‘페르(Pair)’들이 모인 의회는 오늘날의 상원에 해당한다.

시인이자 작가로 이름을 날린 빅토르 위고는 1845년 종신직 ‘페르’에 임명됐다. 그러나 1848년 일어난 2월혁명을 계기로 위고는 공화파 정치인으로 변신, 파리 세느강 구역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된다.

위고는 1851년 후에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이 제정 수립을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자 분연히 일어나 항거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내리자 브뤼셀로 피신한 뒤 도버해협의 저지와 게르네시 섬 등에서 19년 동안 망명의 세월을 보낸다.

이 때의 오랜 고행의 산물로 나온 ‘레 미제라블(1862)’로 위고는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는다.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물러나자 파리에 돌아온 위고는 다시 하원의원에 이어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이때 벌써 빈민 구제, 언론자유 보장, 사형제 폐지, 여성과 아동의 권리 신장, 초등학교 의무교육, 노예제 폐지 등을 주창할 정도로 깨어 있었다.

정치인으로서 위고의 사상의 핵심은 통합과 관용이었다. 1848년 위고는 파리에 있는 자신의 집앞 보주 광장에 ‘자유의 나무’를 심는 행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형제애와 자유 평등의 민주주의의 사상을 세계 모든 나라에 전파, 통합 유럽국가를 넘어 세계 민주 공화국을 이룩하자.”

이같은 위고의 사상이 밑거름이 돼 오늘날 프랑스에 세계 망명객들을 포용하는 관용의 보금자리가 만들어진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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