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2001뉴웨이브]이평재 '마녀물고기'

  • 입력 2001년 12월 16일 18시 04분


《독특한 상상력의 지평을 열어보인 이평재의 첫소설집 ‘마녀물고기’(문학동네)는 올해 한국 문학이 거둔 수확이다. 여기 수록된 단편 ‘거미인간 아난시’의 한 작중 인물의 발언처럼 그녀의 작품은‘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소설은 사람들이 살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고수해온 ‘경계’들이 어떻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사라지고 마는가, 그리고 그럴 때 그 속에 갇혀 사는 존재들은 어떤 혼란과 충격 속에 던져지며 어떻게 변화해나가는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나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상상력을 무궁무진하게 증폭시켜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무너뜨림으로써 소설의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싶어한 것이었다."

이평재의 첫소설집 '마녀물고기'에 수록된 단편 '거미인간 아난시'의 한 작중인물이 하는 발언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그대로 이 작가의 작품세계를 열고 그 핵심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열쇠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평재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궁극적으로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무너뜨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경계"란 기존 질서가 그어놓은 구획선을 의미하며 따라서 경계의 침범은 당연히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과 금기의 위반을 수반한다. 이 작가의 소설은 사람들이 살면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의지하고 고수해온 "경계"들이 어떻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사라지고 마는가, 그리고 그럴 때 그 속에 갇혀 사는 존재들은 어떤 혼란과 충격 속에 던져지며 어떻게 변화해나가는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일상적 삶을 살고 있는 존재에게 불현듯 내습해오는 어떤 사건, 어떤 조짐 앞에서 주인공은 동요하고 방황하고 끝내 광기에 사로잡히며 범죄와 타락의 어두운 아가리 속으로 빠져든다. 예컨대 표제작 '마녀물고기'에선 빗길에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유발하고도 뺑소니를 친 뒤 죄의식에 시달리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서큐버스(음몽마녀 淫夢魔女)에 사로잡히게 되며 섹스에 대한 비정상적인 욕망으로 인해 결국 정신병원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다.

서큐버스, 거미인간, 푸른 고리문어, 마야의 구쿠마츠 등 작가가 동서양의 각종 신화와 민담 및 생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창안해낸 환상적 존재들은 일상의 틈새를 비집고 출몰한 다른 세계의 환영이자 인간의 무의식 속에 서식하고 있는 욕망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작가는 인상적인 이미지와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통해 현실을 침식해 들어오는 매혹적이면서 불길한 힘과 징후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물론 그동안 우리 문학에서 환상과 신화를 작품의 주요 동력으로 삼은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모범적인 선례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평재의 작품세계가 지닌 독특한 면모는 단순히 현실과 환상, 일상과 신화의 접속을 통한 경계의 와해를 추구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액질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는 개성적인 상상력의 작용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에 있다.

'마녀물고기'에서 빗길에 전복된 차량에서 쏟아진 먹장어가 주인공의 발을 휘감아오는 것에 대한 묘사에서 역력히 드러나듯 이 작가의 소설에선 흐물흐물하고 녹아 없어지기 직전의 젤 상태의 존재들이 자주 출몰한다.

그것은 "푸른 고리 문어 입 속의 표피 점막에 싸여 있는 내 성기"('푸른 고리문어와의 섹스')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가렵던 살갗이 부풀어올라 이내 별 모양의 검붉은 덩어리로 변해가"('불가사리 냄새')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아가위 나무의 우울'에서 작중인물이 "치즈케이크"나 "걸쭉한 연어 샐러드를 퍼먹고" 있는 모습에 구역질을 느끼는 것은 경계 상실과 존재의 액화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작가의 소설에 높은 빈도로 등장하는 섹스나 자궁회귀의 모티브 역시 바로 주체와 대상이 고정된 경계를 상실하고 무형태의 카오스 상태로 빠져드는 도입부 역할을 하고 있다.

이평재의 상상력을 추적해나가면 이러한 "질척거리는" 점액질의 세계 저편에 "한없이 막막한 공간"이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가가 그 낯선 세계의 풍경 속으로 얼마나 더 깊이 전진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은 문학독자들에게 맡겨진 불안하면서도 매혹적인 일이 될 것이다.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 이평재는 누구

1959년 서울 출생.

198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대학원 졸업 (미술교육 전공).

1986∼1998년까지 5차례 화가 활동.

1998년 단편 ‘벽속의 희망’로 등단, 동서문학신인상 수상.

2001년 단편집 ‘마녀물고기’ 발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