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실업계 고교 "이름 바꿔봐?"

  • 입력 2001년 9월 19일 19시 27분


‘학교 이름이라도 바꿔보자.’

 신입생 충원조차 어려울 정도로 피폐해지고 있는 실업계 고교에 ‘교명(校名) 바꾸기’ 바람이 불고 있다. 이 같은 개명(改名) 붐은 학교 이름에서 가능한 한 실업계라는 흔적을 지워야 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는 실업계 고교의 딱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실업계 고교 교사들은 “현재로선 실업계 고교의 앞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름만이라도 바꾸어 보자는 것”이라며 “개명에 앞서 실업계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인식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업계 개명 붐〓1974년 문을 연 경북 봉화군의 봉화상업고등학교.

 99년 봉화정보고교로 교명이 바뀌었다가 올해부터는 다시 경북인터넷고교로 바뀌었다. 수년 전 500여명을 넘던 재학생 수는 현재 25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학교 관계자는 “시골 학교라는 이미지를 벗어나자는 뜻에서 교명을 바꿨다”며 “학교 이름에서 ‘상고(商高)’티를 뺀 뒤로는 학교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수산계 고교로선 우리나라 최대규모인 포항수산고교는 내년부터 학교이름을 ‘포항해양과학고’로 바꾸기로 최근 결정했다.

 50년동안 ‘수산(水産)’이라는 이름을 써왔지만 수년 전부터 동창회에서 교명 변경을 강력히 요구하는 데다 학생과 학부모들도 ‘수산’이라는 이름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나라 10여개 수산계 고교 중 ‘수산’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학교는 완전히 사라졌다. 

실업고 이름변경 사례
개교당시변경
대구여자상업고 대구여자경영정보고
경일여자상업고대구정보관광고
대구농림고대구자연과학고
구미여자상업고 구미여자정보고
안동농림고 안동생명과학고
풍기공업고 영주과학기술고
성의여자종합고 성의여자고
포항수산고 포항해양과학고
봉화상업고경북인터넷고
경북여자상업고경북여자정보고

 90년 전통의 대구농림고교는 지난해부터 대구자연과학고로 바뀌었다.

 3년 전부터 실업계 고교에 불고있는 개명 붐 때문에 교명만 가지고는 인문계인지 실업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학교가 많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 고교 중 실업계 고교는 38%. 이 중 농업계 고교는 자연과학고교나 생명과학고교로, 상업계 고교는 정보고교로, 공고는 과학기술고교 등으로 전체의 약 40%가량이 학교 이름을 바꾸었다.

 실업계 학급이 포함돼 있던 종합고교는 교명에서 ‘종합’이라는 말을 지우고 있고, 교명을 바꾸지 않은 학교도 학과의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원예과는 식물자원과, 상업과는 경영정보과 등으로 바꾸는 식이다.

 ▽대안은 없나〓실업계 고교의 교명 변경은 농업 공업 상업 수산업 같은 기초산업을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교사들은 “답답하니 교명에 분칠이라도 해보는 것”이라며 “학교 이름에서 실업계 냄새를 지우고 나니 마치 다른 학교에 다니는 것 같다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업고 교사들은 “개명 붐은 농고학생〓농사꾼, 공고학생〓공돌이, 상고학생〓장사꾼, 수고학생〓뱃놈이라는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며 “정작 바꿔야 할 것은 교명이 아니라 실업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인식”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비틀거리는 실업고를 바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수능에 실업계열을 신설하는 등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대구시교육청 정호상(鄭浩相) 교육국장은 “실업교육은 고급 기능인력을 양성한다는 큰 틀을 유지하면서 대학이나 직업 선택이 쉽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도교육청 성병길(成炳吉) 과학산업교육과장은 “실업계를 기피하는 풍토와 대학진학을 선호하는 분위기 때문에 실업담당 교사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학교분위기는 침체돼 있다”며 “당장 시급한 것은 대학입시에서 실업계를 배려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권효기자>sapi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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