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대담-시인 김광규vs평론가 남진우

  • 입력 2001년 4월 3일 19시 08분


좌-김광규, 우-남진우
좌-김광규, 우-남진우
◇'21세기 한국문학의 좌표'-"문학은 늘 시대를 반영해야할 운명"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았던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 한국의 정치사 뿐 아니라 지성사에 있어서도 일대 혁명을 이뤘다. 그 주역이었던 4·19세대가 이순(耳順)의 고개를, 386세대가 불혹(不惑)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이 두 세대는 이제 통일의 시대를 맞아 어떻게 한국 지성사를 써나갈 것인가? 각 분야별로 두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대담을 통해 21세기 한국 지성사의 흐름을 짚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한다. <편집자>

4·19 세대 문인을 대표하는 시인 김광규씨(60)와 386세대의 전위에 서 있는 시인이자 평론가인 남진우씨(41)가 만났다. 서로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3시간이 훌쩍 넘어섰다. 이 자리에서 새삼 확인한 것은 20년 터울을 뛰어넘어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란 점이었다. 그 거울의 모양과 가리키는 대상이 서로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김광규〓저는 대학 1학년 때 4·19를 겪었습니다. 일제 치하에 태어나긴 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광복을 맞았기 때문에 일본어로 교육받은 이전 세대와는 달리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한글로 문학 작품을 쓴 첫 순수 한글세대이기도 하구요. 일본어 중역본 대신 외국 문학작품을 원문으로 읽은 첫 세대입니다.

▽남진우〓저는 4·19세대의 작품을 읽으면서 ‘감수성의 혁명’을 느꼈습니다. 50년대 시인중에서 김수영 김춘수 등의 작품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지만, 사실 어휘나 감수성의 낡음이 분명 존재하거든요. 하지만 4·19세대의 작품, ‘무진기행’ 같은 김승옥의 소설이나 김광규 정현종의 시는 ‘동(同)시대 문학’으로 읽힙니다.

▽김〓사실 한국문학사에서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교량을 마련한 것이 우리 세대라고 생각해요. 제 또래 작가 중에서 오규원 같은 시인을 예로 들면, 이상(李霜) 같은 일제시대 작가를 빼고는 우리 문학사에 첫 번째 모더니스트라고 불러도 될 정도예요.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리얼리즘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노털’들이죠.

▽남〓올해초 나온 ‘김광규 깊이읽기’(문학과 지성사) 표지에 실린 김광규 선생님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모던한 시를 발표하신 선생님께서 한복 입으신 모습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더군요. 서구적인 ‘근대성’을 이 땅에 뿌리내리면서도 전통의 연속성을 잃지 않으려는 4·19 세대의 의미를 사진에서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김〓저 같은 4·19 작가는 평생 동안 시대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남 시인 같은 386세대 작가들은 훨씬 ‘라이트’(light)해진 것 같아요. 역사에 대한 칙칙한 부담감을 벗어난 것 같고, 성(性)적인 자유분방함에서도 역시 우리와는 많이 달라요. 또 상업적 성공을 노골적으로 지향하는 경향도 강한 것 같고….

▽남〓하지만 저희는 4·19세대―유신세대―광주세대와 X세대―N세대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세대입니다. 문학적 성취에 있어서도 어중간한 단계에 있는 것 같아요. 아직 4·19세대처럼 당당한 위치를 부여받지도 못했고, 젊은 후배 세대와 발랄함을 겨룰 수 있는 입장도 아니거든요. 한 마디로 ‘어정쩡한 세대’입니다.

▽김〓저는 지금까지 500여편의 시를 발표했습니다. 얼핏 보면 자연시나 일상시 같지만 모두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제 시(詩)도 우리 세대의 좌절과 절망을 과장없이 노래한 작품이지요. 386 세대의 젊은 작가들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의 가벼움이나 언어적 유희조차도 이 시대의 내면성을 반영한 것이겠지요. 중요한 것은, 동시대의 현실을 동시대의 언어로 형상화할 자유를 누리되, 동시대를 뛰어넘는 문학작품을 쓰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맞는 말씀이십니다. 386 세대의 역사의식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저는 ‘내면성의 재발견’이란 점에서 이를 옹호하고 싶습니다. 80년대 우리 문학을 육중하게 짓누르던 정치상황을 막 벗어난 젊은 작가들이 ‘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부딪쳤고, 이를 진지지게 파고 들었던 사실은 분명히 평가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김〓시대는 변하고 문학은 늘 당대의 언어로 이를 반영해야할 태생적인 운명을 갖고 있어요. 우리 세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훗날 지금의 젊은 작가의 작품이 한 시대의 증언으로 평가받을 때가 오겠죠.

▽남〓저는 그런 점에서 분명히 386 세대의 문학이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너무 손쉽게 가벼운 문학으로 몰아가는 세간의 평가가 불만스럽습니다. 그러나 사회성과 개인성 사이의 어정쩡한 입장에서 고민하다 보면 ‘제3의 길’이 생기리라고 기대하지요.

▽김〓남 시인 생각하기에 386 작가 중 그렇게 ‘어정쩡한 작가’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웃음).

▽남〓너무 많아서요…. 일단 시에서 장정일 이문재 유하, 소설에서는 윤대녕 은희경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들에 대한 적절한 예우와 의미 부여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들을 손쉽게 신세대 문학의 가벼움 속으로 도매금으로 넘기려는 일각의 시각도 경계해야 하구요.

▽김〓저도 요즘 젊은 작가의 가벼움은 방법적인 전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역사의 중압감, 지사(志士)적인 태도에서 벗어난 가벼움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죠.

▽남〓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젊은 작가들은 십자가를 지려는 분위기가 아닌데도 자꾸 짊어졌으면 하는 시각이 있는 것 같아요. 십자가가 안보이면 새로 못질해 만들어서라도 짊어지워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시각마저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두 사람은 대담 도중 ‘문학이 위기’에 대해 언제 순수문학이 시장 좌판 전면에 나서본 적이 있느냐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문학의 본성에 대해 김씨는 “속도 경쟁시대에 가장 비능률적인 제작 방식”이라고 말했고, 남씨는 “남들이 뭐라건 우직하게 제 갈길을 가는 바보같은 자세”라고 했다.

◇김광규씨 약력

△1941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독문학 박사학위

△현 한양대교수

△대학시절 이청준 김주연 염무웅 김현 김치수 김승옥 박태순 등과 문학활동

△1975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녹원문학상’‘오늘의 작가상’‘김수영 문학상’ 등 수상

△시집 ‘아니다 그렇지 않다’‘크낙산의 마음’‘좀팽이처럼’‘물길’ 등.

◇남진우씨 약력

△1960년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1980년대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평론집 ‘바벨탑의 언어’ ‘신성한 숲’

△‘대한민국 문학상 신인상’ ‘동서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정리〓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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