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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2월 11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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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서울지법 2층 로비에는 5살짜리 B군이 혼자 울며 서 있었다. 부모를 찾아 법원을 헤매며 서럽게 울던 이 소년은 결국 법원 직원의 손에 이끌려 근처 파출소로 보내졌다. 소년의 부모는 어디로 간 것일까.
30대 초반인 B군의 부모는 서울지법 가정법원에서 이혼 소송을 벌이던 중이었다. 가정불화가 계속되자 아내 A씨는 남편 B씨와 별거하면서 각각 2살짜리 딸과 5살짜리 아들을 하나씩 나누어 키우고 있었다.
아내는 컴퓨터를 배운 뒤 새 직장을 얻게 되자 남편이 양육비 명목으로 제시했던 수천만원의 돈도 포기할 테니 딸까지 데려가라는 입장이었다. 남편 역시 아들마저도 맡지 못하겠으나 아내가 다 맡아 키워라고 완강히 버티는 상태였다.
▼이혼법정 양육권 떠넘기기▼
법정에서 서로 양육책임을 떠넘기던 두 사람의 공방은 판결에 앞서 진행됐던 이날의 조정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계속됐다. 아내는 "아빠에게 가라"며 B군의 등을 떠민 채 사라졌고 남편 역시 "엄마와 함께 살아라"며 혼자 법원을 떠났던 것.
B군이 자신을 외면하는 부모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튕겨 다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 부부는 몇 번이나 아이를 상대편의 집 앞에 데려다 놓고 사라지는가 하면 상대방이 데리고 온 아이를 다시 집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아 버리기도 했다.
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서로 양육권을 포기하겠다고 할 경우 아이를 누구에게 보내야 할지 난감하다"며 "법적으로 결국 어느 한 쪽의 책임을 인정했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어린 자식들이 받는 정신적 충격과 고통은 치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이처럼 부모가 모두 양육을 기피하는 경우는 대부분 양육에 수반되는 경제적 부담을 견디기 힘든 가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가정에서도 같은 문제로 법원을 찾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의사와 행정고시 합격자 부부가 "이혼한 뒤 서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은데 법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며 법원에 상담을 의뢰하기도 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은 "이혼한 뒤 서로 양육을 기피하는 부부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멀쩡히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고아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맡겨지기도 한다"며 이는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만은 뺏길 수 없다"며 치열한 양육권 싸움을 벌이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 이라고 말했다.
▼중상층 가정도 상담늘어▼
이같은 양육 기피 현상은 특히 젊은 부부들의 이혼율이 증가하면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곽 소장은 "양육책임이 이혼한 뒤 재혼이나 독립적인 삶 등에 걸림돌이 된다는 부모의 이기적인 생각이 한 원인"이라며 "이는 과거 자신보다 아이의 미래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들, 특히 여성들이 이제는 아이보다 자기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여성계에서는 "양육에 수반되는 물질적, 정신적 어려움은 어느 한쪽이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앞으로 이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지에대해 사회적 차원의 논의가 있어야 할 것"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