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자본주의 비상구는 있다 '기로에 선 자본주의'

  • 입력 2000년 12월 1일 19시 51분


▨ 기로에 선 자본주의 / 앤서니 기든스·윌 허튼 편저 / 박찬욱 외 옮김 / 434쪽 1만2000원 생각의나무

시장은 얼마만큼의 쇠를 먹어야 배가 불러지는 불가사리일까? 시장의 논리는 이제 전통적 경제영역을 넘어 철도와 전기, 의료와 환경, 복지 등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시장의 횡포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겨지던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세계화’라는 말의 핵심은 거칠게 말해서 ‘국경 없는 시장’의 완성이다. 세계화 예찬론자들에게 이 거추장스런 국경은 ‘규제’와 ‘세금’, ‘비효율’의 원흉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언제부턴가 S&P와 무디스의 평가, IMF와 미 연방준비은행의 동향, 환율과 주가의 등락이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됐다. 전지구적 시장은 경제 그 자체를 사로잡기에 앞서 사람들의 의식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듯하다.

실제로 최근의 경제불안정을 지켜보면서 끔찍한 1997년의 위기가 다시 올 것이라는 경제연구소들의 예측에 눈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의 금융위기에 대해 ‘도덕적 해이’라는 유죄판결이 내려진 것이 다소 의아한 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IMF의 이 판결은 현실 속에서 기업인들의 도덕재무장(?)이 아닌 노동자의 퇴출과 실업이라는 ‘벌’로 나타났다. 1997년 위기의 근저에 아시아자본주의의 천민성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설명 역시 경제적 실패의 원인을 ‘도덕’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온전한 설명은 아니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미국자본주의의 성공비결은 그것의 고상함이나 귀족성으로부터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토니 블레어의 정책브레인이며 ‘제3의 길’의 저자인 앤서니 기든스와 영국의 좌파 일간지 ‘가디언’의 편집자 경력을 가진 윌 허튼이 편집한 ‘기로에 선 자본주의’는 앞서의 답변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다양한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책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현단계 자본주의의 빛과 그늘을 드러냄으로써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각계 지식인들의 진단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대담을 통해 기든스와 허튼은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가 이전의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하는 물음을 둘러싸고 논전을 벌인다. 기든스는 정보화와 지식기반 산업에 기초한 세계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 시각을 가지며 제도의 현대화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반면 허튼은 독일로 대표되는 ‘이해당사자 자본주의’와 영미식의 ‘주주자본주의’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고, 궁극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에서 부정적인 점만을 골라 고치면 된다는 기든스의 생각이 안일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근대성과 노동, 지구화, 섹슈얼리티 등과 같은 폭넓은 주제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해진 울리히 벡, 대리양육의 고리를 통해 이어지는 제1세계와 제3세계간의 지배사슬을 예리하게 포착한 알리 혹스차일드, 미국에 이민한 한국인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시간―장소에 대한 경험을 분석한 뒤 세계화 시대의 ‘정체성’ 문제에 접근한 리처드 세넷 등의 글은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시장이 불가사리라는 비유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불가사리이든, 이 책에서 카스텔스가 말하는 ‘자동인형’이든, 시장은 폭식이 치명적 위험이 될 수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세계적 규모의 자기조절적 시장이라는 환상에 대해 지식인들이 이토록 큰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세상이 결코 이긴 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시장에서 진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배려가 없이는 시장 자체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인식 때문이 아닐까?

이호영(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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