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수 영재교실]극성 엄마들,노화백 호통에 '찔끔'

  • 입력 2000년 7월 12일 19시 16분


“제 아이도 영재인가요.”

7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미술아카데미. 한해에 두차례밖에 없는 김흥수 화백의 영재미술교실 오디션이 열리는 시간이다.

손에 손에 ‘미래의 피카소’를 끌고 온 젊은 학부모들로 입구부터 혼잡하다. 최신 유행하는 듯한 검은색 프라다 그립백을 쥔 젊은 아줌마가 셋이나 한눈에 들어온다. 참가자 명단을 훑어보니 상당수가 서울 강남이나 경기 분당에서 온 아이들이다.

이날 김화백이 낸 주제는 ‘물가에서’와 자유상상화. 코흘리개 꼬마들이 손에 잔뜩 크레용을 묻혀가며 그림에 빠져든다.

김화백이 한 여자아이에게 “몇학년이니” 묻는다. 대답이 없다. 다시 묻는다. “너 유치원에 다니니.” 아이가 고개만 끄덕인다. “이 녀석 할아버지가 얘기하는데 고개만 끄덕여. ‘네’라고 말해봐. 너 유치원에 다니니.” 아이는 태연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그림에 열중한다. 나이 여든을 넘긴 노화가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바깥이 시끄럽다. ‘결과는 한달뒤인 8월 첫째주에 개별 통지하고 선발자 수는 김화백의 마음에 달렸다’는 주최측의 답변에 이날 당장 영재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아줌마들의 부푼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다. 오디션 비용으로 2만원을 냈으니 김화백의 평가서라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다. 김화백이 나와 꽥 소리를 지르자 꼬리를 빼고 물러간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하나둘 빠져나간다. 노화가가 크레용이 손에 묻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아이들이 제출한 그림을 뒤적거리다 한참만에 그림 두점을 골라낸다. 하얀 구름이 바다처럼 파랗게 물들어 있다. 흔히 그림 한쪽으로 치우쳐 그리는 햇님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열기를 더한다. 넘실대는 파도와 그 속에 헤엄치는 사람을 비현실적으로 배치한 모습이 오히려 짜임새가 있다.

아까 고개만 끄덕이던 여자아이가 뒤늦게 그림을 그리고 나간다. 김화백이 “손재주와 구성력이 있다”며 골라낸다. 남자아이 하나도 뒤늦게 그림을 내고 나간다. 밖에서 기웃거리던 아이엄마가 들어와 “뭐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보챈다. 아이 그림을 흘끗 쳐다본 노화가가 볼 것도 없다는 듯 치우라는 손짓을 하자 무안한 듯 밖으로 나간다.

김화백이 시험장을 나서며 한마디 한다. “요즘 얘들 상상화를 그리라면 포켓몬스터나 세일러문을 그린다니까.”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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