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칼럼]김주영 장편소설 '아라리 난장'

  • 입력 2000년 6월 23일 19시 08분


환갑을 넘긴 작가 김주영의 수첩은 깨알같은 메모로 가득하다. 휴대용 녹음기도 그의 비밀 병기. 이 땅 구석구석을 돌며 거리와 장바닥에서 채집한 온갖 잡설과 푸념, 한탄, 욕설이 그의 ‘확장 메모리’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그가 세 권 짜리 새 장편소설 ‘아라리 난장’을 선보였다. 80년대 초반의 대표작 ‘객주’가 지난시대 보부상들의 애환을 그려냈다면, ‘아라리 난장’은 ‘물동량의 적기 이송이 장사의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 그 승부의 세계에 뛰어든 사내들의 의리, 배반, 사랑의 장쾌한 서사적 드라마를 그려낸다’ (작가 김원일).

주인공 한창범은 직장에서 용퇴한 뒤 이혼까지 당하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삶을 주체할 수 없어 도망치듯 길떠난 인물. 활어 운반차를 모는 박봉환을 만나 주문진에 흘러들고, 어부 변씨와 식당 여주인 승희 등을 알게 된다. 창범 일행은 5일장을 떠도는 행상으로 변신, 갖은 곡절을 겪은 끝에 중국에까지 거래선을 넓히는데….

에피소드 사이사이에는 거칠지만 순수한 사나이들의 우정, 질펀한 육욕, 애틋한 사랑, 배신, 화해가 곁들여져 해풍에 얼다녹다한 황태처럼 구수한 맛을 더한다. 귓전에 감겨드는 팔도 사투리는 풀뿌리 인생의 질박한 삶을 한층 생생하게 풀어낸다.

작품은 창범과 승희가 산간 오지에 보금자리를 마련, 다른 일행들과 만날 것을 약속하는 데서 끝을 맺는다. 작품을 여는 화두가 IMF 위기를 헤쳐나가는 서민의 모습을 담는 데 있다면, 작품을 닫는 작가의 화두는 자연과 화합하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시대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로키 산맥 정상 부근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들은 한결같이 무릎을 꿇은 상태로 엎드려 살고 있다.(…)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무릎 꿇은 나무를 베어내어 바이올린을 제작한다. 어느 나무보다 공명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의 화두처럼 들리는 책 서두 ‘작가의 말’. 낮은 사람들의 삶으로 내려감으로써 인생의 풍요로움에 다가간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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