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

  • 입력 2000년 6월 9일 23시 50분


★'물질문명과 고전의 역할' 임석재 지음/북하우스펴냄★

한국의 건축가인 저자는 책 머리부터 그럴듯한 외국의 건축물들을 열거하는 대신에 곧장 서울 신촌의 독수리다방으로 질러간다. 왜? 신촌은 한국의 대학문화가 가장 먼저 발아한 역사성을 갖는 공간이니까. 아니 그런 공적인 개념규정 이전에 신촌은 80학번인 저자의 정신적 요람이니까.

저자는 신촌에 대해 개화기, 일제 강점기, 사상 냉전기, 독재 개발기, 민주화 투쟁기를 거치며 한국현대사의 고민이 증언되고 토론되던 곳이므로 여느 저잣거리와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Landmark)가 있어야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 그 신촌의 랜드마크가 바로 독수리다방, 일명 독다방이다.

학생들이 주문도 안하고 한두시간씩 눌러 앉아있을 수 있던 허름한 독다방은 30년 세월을 버티다 90년대 하얀 새 건물로 개조됐다. 새로 지어진 독다방은 건물 그 자체로는 합리주의, 후기모더니즘, 신구성주의등의 양식사조가 섞인 수준작이라는 것이 저자의 평가. 그러나 저자는 깔끔한 새 독다방이 ‘통사적(通史的) 상징성’을 놓친 점을 아쉬워 한다. 지나간 30년의 상징성에 상응하는 기억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수리 다방에 요구되는 것은 우리 상업문화에 대한 건축적 대안이나 이정표와 같은 모델이다. 미국이 1930년대 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국 상업문화를 대표하는 아르데코라는 예술양식을 창출한 바 있듯이…. 상업문화에도 족보와 역사가 있는 것이다.’

저자의 족보타령, 건축의 정신성 회복, 고전에의 회귀 주장은 기실 ‘그 공간속에 사는 인간’을 되찾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저자는 독자에게 ‘건축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 남산 중턱 쯤에 서서 해 넘어가는 서쪽 동네를 10분만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낮은 능선 위로 올망졸망 모여있는 수많은 집들을 보노라면 가슴이 푸근해진다.… 내일은 더 열심히 살겠다는 용기도 생기고…. 학자들은 이런 내용을 수십가지 미학개념으로 어렵게 설명하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이런저런 건물 속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 곁에 늘 있는 것이다.’ 302쪽. 1만6000원.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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