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신적 실업자'?…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離職

  • 입력 2000년 5월 5일 2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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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은 옛날 얘기다. 요즘 사무직 근로자들의 분위기는 아노미(혼란) 그 자체다.”

한 대기업 중간간부가 최근의 극심한 이직(移職)현상을 체험하며 푸념처럼 뱉어낸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과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벤처 열풍, 그리고 그에 뒤따른 ‘직장 옮기기 신드롬’이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부각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선 ‘정신적 실업’이란 유행어가 나돌고 있다.

▼근무능률 저하 초래▼

정신적 실업은 직장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자신의 직장과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기회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옮길 궁리를 하고 있는 상태.

‘기회만 있으면 곧 직장을 옮길 텐데 열심히 일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젖어 있는 직장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신조어인 셈. 일하는 인원에 비해 일의 능률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최근 근로현장에서 확산되고 있는 정신적 실업은 집단적인 분위기를 타고 있어 문제가 더 심각하다. 직장을 옮길 계획이 있는 사람은 물론 계획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므로 언젠가는 옮겨야지’ 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일의 능률을 저하시키고 있다.

3, 4월 두달 사이 3명의 직원이 벤처기업으로 옮겼다는 한 대기업의 부장은 “누가 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전체적으로 업무 추진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떠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추진하고 있는 일을 마무리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사무실 분위기마저 어수선해 상반기 목표달성은 사실상 물건너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같은 현상은 기업에서 관행처럼 굳어져 있던 ‘평생 직장’의 문화가 IMF 한파와 ‘벤처 열풍’으로 뿌리째 흔들리면서 가속화하고 있다.

▼IMF한파-벤처열풍 휴유증▼

IMF 한파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직장인들이 자신의 직장에 대해 가졌던 신뢰와 소속감이 무너진데다 어떻게 직장을 옮기는 것이 올바른 방법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 ‘옮기고 보자’는 식의 ‘이직 열풍’이 불었다는 것이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근로자가 직장을 옮기더라도 전직장의 간부들로부터 추천문을 받아야 하고 이는 다음 직장을 얻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직장을 옮길 생각이 있더라도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 한 더 좋은 직장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직장인 윤리해이 지적도▼

반면 우리의 경우 이런 추천문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고 직장 옮기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이직을 계획할 때 이를 숨기고 추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연히 “떠나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맡은 일에 소홀해지며 심지어 업무의 인수인계도 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지난주 대기업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2일부터 경영컨설팅회사로 옮긴 문모씨(30)는 “훌쩍 떠나버리는 바람에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했다”면서 “그렇다고 직장 옮긴다고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고 말했다.

고려대 경영학과 박광태(朴光泰)교수는 “이직하는 직장인들은 전직장에 대한 기본적인 윤리의식을 갖춰 항상 최선을 다하고, 회사도 구성원의 이직을 보편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자세를 가져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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