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창녀' 소설로 본 현대 프랑스 철학의 흐름

  • 입력 2000년 3월 24일 19시 33분


□악마의 창녀

카트린느 클레망 지음/새물결

손톱이 짧은 긴 손가락으로 칸트의 방정식을 쓴 칠판을 백묵으로 두드리며 단조롭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강의하는 질 들뢰즈.

“그런데, 칸트는 그에 대해 뭐라고 말했지, 응? 뭐라고 말했느냐고? 그건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말했어, 칸트는….”

베르그송주의자였던 들뢰즈는 은근하면서도 카리스마적인 몇 마디 말로 장 폴 사르트르를 옹호했고, ‘진지하면서도 흥분 잘하고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면서 반항적인 일종의 미친 개’ 펠릭스 가타리를 만나 ‘앙티 오이디푸스’(1972)를 완성하며 구조주의 시대의 종식을 알린다.

철학교수 저널리스트 외교관 전업작가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가졌고 철학소설 ‘테오의 여행’(동문선)으로 이미 국내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저자 클레망은 2차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89년까지 프랑스 철학계의 지성사를 그려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 시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루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시대, 68년 5월 이후 베르나르 앙리 레비, 앙드레 글뤽스만 등의 신철학자 시대.

저자는 “3기에 걸친 프랑스 현대 지성사에 대한 지루한 평론보다는 투쟁, 화해, 지적 충격, 에피소드와 사상적 우연들로 가득찬 생동감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바로 그 삶 자체를 복원하고, 나아가 그 사상을 복권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책(원제목 La Putain du Diable)은 서두에서 프랑스 지성계의 자랑이자 1960년대의 마르크시스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알튀세르가 자기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성(理性)’의 위기를 화두로 던진다. 이성을 ‘악마의 창녀’라고 표현했다는 루터의 말에 주인공이 공감하는 대목에 이르면 저자가 ‘이성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끊임없는 헌사(獻辭), 그리고 그의 구조주의를 지성사의 주축으로 이끌어 가는 저자의 이야기 구조는 전후(戰後) 프랑스 지성사가 이성에 대한 반성과 복권의 긴 여로를 걸어왔음을 보여준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친독일 정권이었던 ‘비시’나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의 충격 속에 이성이나 휴머니즘은 설 자리를 잃었으나 종전(終戰)의 계기를 만든 얄타회담, 68년 5월의 시위와 모택동주의에 열광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던 시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현대 프랑스철학의 ‘현장’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보탬이 된다.

68년 5월 대규모 학생 시위 당시 소르본대 철학과의 현장에 있던 주인공 카트린느 클레망과 그의 친구 줄리앙의 대화와 회고를 통해 진행되는 이야기는 들뢰즈와 라캉, 레비-스트로스, 푸코, 데리다 등의 강의 모습과 학생들과의 토론, 그리고 사상적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해 가며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당시 철학자들의 성품이나 외모, 또는 그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지나치게 묘사하느라 정작 사상가들의 사상이 산산히 흩어져 버린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성사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생생하게 ‘사상의 복권’을 하고 싶었다는 저자의 성과는 독자의 눈에 잘 잡히지 않는다. 채계병 옮김 527쪽 1만3000원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