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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3월 24일 19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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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소노키의 딸 요시코(淑子)가 보관해오다 1986년 1월 일본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崔書勉)원장에게 기증한 안의사의 유품 41점 가운데 하나로 최원장이 안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공개했다.
안의사가 순국한 1910년 3월 26일자로 되어 있는 이 문서는 “부슬비가 내리다”로 시작돼 안의사가 7칸의 계단을 올라 교수대에 앉아 순국하기까지의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소노키는 안의사가 “내가 한 일(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日-韓)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소노키는 “안의사가 조선에서 만든 명주옷을 입었으며 (일본 당국이) 그의 시체를 송판으로 만든 관에 넣어 흰 천으로 덮는 등 매우 정중하게 취급했다”고 기록했다.
최원장은 “당시 만주일일신문에 이 문서가 ‘안중근의 최후’란 제목으로 실린 것을 확인했다”며 “소노키가 안의사의 인품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신문사에 문서를 건네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안의사가 순국한 뒤 중국 다롄(大連)에서 안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무대에 올려진 사실도 만주일일신문을 통해 확인됐다.
일본의 가부키좌(歌舞技座)소속 극단인 신유샤(親友社)는 당국의 허가를 얻어 1910년 4월 7일 안의사의 망명부터 순국까지를 그린 신파극을 상연했다.
만주일일신문은 4월 11일자 공연평에서 “연극이 너무 안중근 중심”이라고 지적, 당시 다롄지방에 안의사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강했음을 보여준다고 최원장은 풀이했다.
최원장은 순국 직전 촬영된 안의사의 전신 사진도 일본국회도서관에서 찾아내 이날 공개했다.
이에 대해 신용하(愼鏞廈)서울대 사회대학장은 “안의사의 최후발언은 알려졌으나 순국 순간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한 문서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