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이윤기 '나무가 기도하는 집'

  • 입력 2000년 1월 8일 08시 46분


▼이윤기 지음/세계사 펴냄▼

‘아무리 볼품없고 하찮은 한 그루 나무일지라도/ 어떤 위대한 인간보다 낫다’

최근 출간된 박용하의 시집 ‘영혼의 북쪽’ 첫머리에 실린 구절이다.

우야 아저씨가 그 말을 듣는다면 기뻐할 지도 모른다. 우야 아저씨가 누구? 이윤기의 새 장편소설 ‘나무가 기도하는 집’(세계사) 주인공이다.

뿌리 뽑힌 채 말라가는 나무를 보면 들판에서 굶어 죽어가는 동물을 떠올리고, 고로쇠 수액을 보면 산 곰에서 뽑아낸 쓸개즙을 생각하는 우야 아저씨.

그의 뒤에 숨은 ‘손’, 작가 이윤기를 만났을 때 그는 뜻밖의 한자풀이로 대화의 첫머리를 열었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원래 뜻을 아십니까?”

본디 불교용어인 ‘신토불이’는, 땅의 인연을 받아 태어나는 생명과 땅 자체가 하나임을 말하는 것. 작가는 “산 것과 죽은 것,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임계점(臨界点)은 없다고 느낀다” 며 말을 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우야(민우)는 노총각 농사꾼.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집 주변에 심는 바람에 그의 집은 ‘나무 고아원’ 또는 ‘나무가 기도하는 집’으로 불린다.

어느날 형부의 계속된 성폭력으로 상처입은 자야 아가씨 (송자)가 그의 집에 찾아들고, 우야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며 치유의 길을 찾아간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황제에서부터 스피노자에 이르는 고금의 ‘나무사랑론’이 소설 중간중간을 수놓는 것은 물론.

“환경소설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작가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환경은 인간을 ‘둘러싼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요. 영어의 ‘environment’도 마찬가지. 오로지 사람만을 중심으로 삼는 ‘환경’이라는 개념은 좋지 않아요. ‘불이(不二)’의 소설이라면 차라리 어떨까….”

자야와 우야 사이에는 어느덧 화창한 사랑이 싹트지만, 부끄러움에 눈뜨게 된 자야 아가씨는 집을 나가버리고, 우야가 그를 찾아 데려오면서 예쁘장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우야가 어떻게 사랑에 눈뜨게 됐을까? 끊임없이 씨와 곁뿌리를 내어 자손을 만들어가는 나무들이 그에게 교훈을 준 것 아닌가.

왜 부끄러움인가. 작품속에서 작가는 “창피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으로의 복귀의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몰염치하고, 자기의 판단만을 신봉하고, 주변에 끊임없이 간섭하는 오늘날의 인간관계에 대한 꾸짖음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자호(自號)는 ‘과인(過人)’이다. 간섭하지도 않고, 주변으로부터 자양을 착취하지도 않으면서 한 삶을 지나가고 싶다는 뜻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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