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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4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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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구할 수 없던 중 고교 시절에는 손에 들어오는 대로 책이라면 다 읽었다. 주로 소설이었고 나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상과 낭만에 젖어보기도 했다. 춘원의 ‘유정’,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 준 감명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나의 대학 4년은 독서생활에서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고시공부를 하느라 육법전서와 법률서적에 파묻혀 살았으니 마음의 양식은 고갈되었고 생각은 좁은 울타리 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황산덕의 ‘법철학’과 최문환의 ‘민족주의 전개과정’이 나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길잡이가 되었다.
사회에 나와서 초기에는 일에 쫓겨 시간을 얻지 못했고 틈이 있으면 시집을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월과 영랑의 서정적 시어들은 나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자양제였다. 30대 후반에 나는 한때 건강이 나빠 많은 고생을 했다.
그때 우연하게 만난 청담스님의 ‘마음’이라는 책은 너무도 신선했다. ‘방 안에서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볼 때 네가 보느냐? 문구멍이 보느냐? 네가 세상을 볼 때 눈이 보느냐? 네가 보느냐? 네가 본다면 진정한 너는 누구냐?’ 이 물음이 던진 충격은 너무나 컸다.
나이가 들어 경영이라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나의 관심은 사람과 리더십에 쏠렸다. 웰렌 베니스의 ‘리더의 조건’(On Becoming Leader), 노엘 티취의 ‘리더십 엔진’ 등을 읽었다. 질투하고 음모하는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치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를 간과하고는 현대 경영기술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를 이해하는데 폴 존스의 ‘모던 타임’은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현대 중국지도자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오늘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깊이 했다. 특히 저우언라이의 전기 ‘맏형’(Eldest Brother)이 준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최인호 이윤기를 좋아하고 김용옥 김경동의 저서들은 언제나 나의 마음의 양식이 돼준다.
길을 가다 우연히 좋은 길동무를 만나면 즐거운 것처럼 나는 가리지 않고 그때 그때 손에 들어오는 대로 책을 읽었고 이런 습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의 책읽기는 체계적인 것이 아니고 산만할 정도다. 나이를 더해갈수록 오늘의 인류문명을 지탱해온 정신적 지주인 동서의 고전들을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젊은날 스쳐 지나갔던 ‘노자’ ‘플라톤’ ‘원효’를 공부하고 있다.
윤병철<하나은행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