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시인 류시화가 히말라야서 부친 새해편지]

  • 입력 1998년 12월 31일 18시 06분


나는 지금 히말라야에 와 있다. 만년설을 머리에 인 거대한 설산들이 영화 화면처럼 새벽 어스름 속에 펼쳐 있다. 언제 와서 봐도 히말라야는 신비하다. 마치 신기루인 양 허공에 떠 있고,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어떤 서늘한 영혼 같은 것이 느껴진다. 더구나 아침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햇빛이 빙벽에 반사되면서 형형색색의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 신비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어젯밤 네팔인 짐꾼에게 새벽에 나를 깨우라고 단단히 일러 놓았다. 먼 여정에 지친 건 마찬가지였지만 짐꾼 쿨바하두르는 충실했다. 새벽도 되기 전에 그는 차가운 손으로 내 이마를 만졌다.

내가 다시 히말라야를 찾은 것은 한 해의 마지막과 새로운 해의 시작을 이곳에서 맞기 위해서다. 저 히말라야가 상징하는 영원성 앞에서 인간이 만든 시간이 덧없는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순간의 의미를 붙잡으려고 먼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거의 매년 새해를 히말라야나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맞이했다. 그것은 이제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어느 해인가는 도시에 있는 내 집에서 한 해의 첫날을 맞이한 적이 있는데 아주 무미건조한 하루가 되어 버렸다. 그래선지 그해를 보내면서는 뭔가 알맹이가 빠진 것 같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일 년을 이루기 어려웠다. 육체적으로도 기가 빠진 사람처럼 허약함을 느꼈다. 삶은 내게, 일 년에 한번쯤은 어디 먼 곳으로 가서 내 자신을 바라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는 게 아니라고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기운을 얻는 일, 그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히말라야에서 새해 첫날을 맞이하면, 그 기운을 받아 이 한 해도 내가 정신적으로 한 뼘 정도는 성장하리라는 걸 예감할 수 있다. 현실의 삶을 살되 거기에 완전히 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머리뼈 속에 박인 내 두 눈이 눈앞의 것만을 보는 쥐의 눈이 아니라 신비한 영혼을 가진 인간의 눈을 더 닮게 되리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때로 수평의 삶에서 수직의 공간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높은 거리에서 자신의 여정을 내려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것은 결코 현실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거기서 진정한 물음과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인간은 진리에, 또는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워진다.구약성서의 모세가 그랬고, 예수는 자주 산에 올라 묵상과 기도에 잠겼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높은 산의 동굴에서 내려와 뭇 군중의 질문에 답했다.

우리는 왜 사는가. 미명 속에서 히말라야는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진다. 어떤 이들은 해답을 찾아 히말라야로 온다고도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히말라야는 단지 질문을 던질 뿐이다. 해답을 찾는 것은 내 자신의 몫이다.

새해 아침에는 무릇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명상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이 삶의 중요한 가치인가. 두 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지금 물질의 안정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다. 돈이 조금 부족해지자 나라와 개인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외화를 얼마큼 갖고 있는지가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한 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 내 자신이 어디에 행복의 기준을 두고 있는지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최근의 전세계 여론 조사에서 개인의 행복도가 가장 높은 나라가 방글라데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방글라데시는 저 히말라야 오른쪽에 있는, 그야말로 주머니 속에 든 게 전재산인 그런 빈국이 아닌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물질의 회복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행복의 기준을 두는가 하는 것이다.

다음 세기는 더욱 발달한 테크놀러지와 컴퓨터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어찌 보면 이제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때때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자연 속으로, 순수함과 때묻지 않은 인간성의 세계로 돌아가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땅을 일구고, 맨발로 흙을 밟는 기쁨을 누리고, 조용히 명상에 잠겨 보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 세기는 이번 세기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불행한 세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바로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고 성장하라는 것이다. 충분한 배움을 얻지 못하면 또다시 삶을 반복하리라는 것은 단순한 동양사상이 아니라 불변의 법칙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빨리 발전하고, 더 가식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순수한 기쁨, 가슴 뛰는 삶, 형제 자매인 동물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는 내게 ‘삶을 크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살되 더 높은 대기를 호흡하라고 말한다. 삶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게 생각할 때 눈 앞의 것, 욕망이 부르는 것에 이끌리고 결국 거기서 틀에 박힌 생활, 인간 소외, 환경 파괴의 문제들이 생겨난다.

서서히 어둠의 자태를 벗어던지고 있는 히말라야는 내게 거듭 일깨운다. 삶을 크게 생각하라고. 크게 생각할 때 삶은 비로소 자기다운 의미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히말라야는 언제 와서 바라봐도 변함이 없다. 늘 그 자리에 영원한 자태로 서 있다. 또한 동시에 매순간 변화한다. 어느 한 순간도 똑같은 색조일 때가 없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삶은 변화하는 매순간의 연속이다. 한 순간이 다른 어느 순간보다 더 값지거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붙잡을 필요가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는 새로운 해의 첫날을 맞으러 며칠 앞서 짐꾼 다섯 명을 데리고 히말라야에 올랐다. 나를 깨우기 위해 밤새 잠을 설친 노총각 쿨바하두르는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내가 떠나온 나라, 지구별에서 ‘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도 이제 곧 금세기의 마지막 1월1일을 맞으리라.

며칠 뒤 히말라야를 내려가면 나는 동인도 시킴 왕국과 북인도 바라나시를 방랑한 후에 1월 말 경에 한국에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또 열심히 내게 주어진 모든 순간들을 살아갈 것이다. 여름에는 옥수수처럼 익어가고, 가을에는 땅 속의 고구마처럼 단단해지고,그해의 마지막 날에는 다시 히말라야에 오게 되기를 꿈꾸리라.

류시화<명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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