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이인화「초원의 향기」,고구려 대륙혼 그려

  • 입력 1998년 9월 23일 19시 38분


작가 이인화(32)의 마음속에 그려진 7세기 동북아시아의 판도는 공인된 세계지도와는 사뭇 다르다. 당(唐)태종, 고종의 치세로 최고의 흥성기를 누리던 당나라는 변방의 소수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전받는 피로한 대국(大國). 돌궐 거란같은 변방 유목민족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러나 이 상상의 지도 속에서 그가 가장 크게 그려넣고 싶어하는 나라는 따로 있다. 고구려.

때는 이미 고구려 패망 후. 그러나 작가의 꿈 속에서 고구려인들은 당나라로 흘러든 뒤 북방 유목민족들과 뜻을 합쳐 대륙을 말발굽소리로 뒤흔들며 새로운 문명을 만든다.

작가는 마음 속 지도를 장편소설 ‘초원의 향기’(세계사·전2권)로 옮겨 그렸다. 당초 95년 6월부터 10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작품. 그러나 연재 종료 후 2년반동안 세차례의 몽골답사 등을 통해 작품을 다시 쓰다시피 했다.

모래먼지 자욱한 7세기 아시아 대륙의 전쟁터로 독자들을 이끄는 이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 고문간. 실제로 신구(新舊)당서(唐書)에 ‘1만호가 넘는 고구려인을 데리고 당나라로 투항해 요서군왕에 봉해졌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초원의 향기’에서 새롭게 탄생한 고문간은 영웅이 아니다. 색주가 아들 출신으로 줄이나 잘 잡아 신분상승을 하려 했으나 뜻하지 않게 고구려 반란자를 은닉한 죄로 잡힌 뒤 파란의 인생역정을 걷게되는 것.

고문간의 인생에 뛰어드는 인물들은 당의 지배를 벗어난 ‘새로운 나라’를 꿈꾼다. ‘동방교’라는 종교를 이념으로 패망한 고구려 대신 대제국 건설을 꿈꾸는 여(女)제사장 아란두, 당나라군이었으나 돌궐의 반란군 지도자가 된 웬푸, 충직한 말갈인 욱사시부…. 싸워야 할 상대는 당나라의 측천무후. 끝없는 전투와 산 채로 살점이 벗기우는 형벌 앞에서도 이들은 굴하지 않는다. 1천3백여년을 훌쩍 뛰어넘어 작가가 꾼 꿈은 그가 주장해온 ‘동아시아론’에 잇닿아 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뚜렷이 하려면 중국 중심이 아닌 제3의 문명으로 우리 스스로를 구별해야 합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고구려와 북방민족의 연대에서 찾았던 거지요.”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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