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김병기 『「김정일」역 안기부 주문대로 연기』

  • 입력 1998년 9월 18일 19시 04분


“한때 어디를 가든 ‘김정일’로 통했습니다.”

탤런트 김병기(51).

30대이상의 시청자들은 그를 본명 대신 ‘아 그때 그 김정일’로 기억한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통제됐던 82년부터 4년 가깝게 방영된 KBS 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김정일로 등장했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붉은 카페트가 깔린 집무실. 곱슬거리는 파마 머리의 그는 안경 너머로 신경질적인 눈초리를 보내다 “집어치우라”는 대사를 습관적으로 내뱉았다.

‘김병기의 김정일’은 80년대 TV의 북한 접근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안기부와 KBS가 기획한 반공물이었다. 작가가 안기부 출신이었고 출연진과 제작진은 수시로 안기부 청사를 드나들며 각종 주문과 격려를 받았다.

김병기의 고백. 82년말경 격려차 녹화현장을 방문한 당시 안기부의 한 실세간부는 “전두환대통령이 이 드라마를 각료들에게 꼭 보라고 권유할 정도로 관심이 많다”면서 “반공을 위해 시작했는데 용공드라마가 되면 곤란하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김정일이 가끔 인간적이고 남자답게 그려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초반부 김정일이 생모를 그리워하는 인간적 고뇌와 남자다운 모습이 등장하고 ‘저렇게 멋있으면 결혼하고 싶다’는 여대생의 전화가 이어지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뒤 의도적으로 나쁘게 그리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정치적 동기로 시작된 이 드라마는 공교롭게도 같은 이유로 85년5월 1백99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남북간의 해빙 무드에 방해가 된다며 종영이 결정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요즘 그는 SBS ‘백야 3.98’에서 북한의 인민무력부장 오극렬을 모델로 한 배역을 맡았다.

“이념적으로 투철한 모습 뿐 아니라 딸 성심(진희경 분)이 최고 권력자에게 짓밟힌 뒤 아버지의 인간적 갈등을 중점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젠 주변의 주문 대신 연출자와 연기자의 판단에 따라 연기를 하고 있으니 세상 정말 많이 달라졌죠.”

〈김갑식기자〉g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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