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 입력 1998년 6월 18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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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선비 기르기 5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유시(遺詩)와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벗들의 거듭된 출사(出仕) 요청에 “어찌하여 나를 귀신 같은 나라의 미친 놈들 속에 들어가 한 패거리가 되라 하는가”라고 내쳤던 반골의 지식인.

그런 그였지만 죽기를 결심하고 약을 먹은 이튿날 아침, 아우가 달려오자 이렇게 탄식하였다. “내가 약을 삼키려다 입에서 뗀 것이 세 번이었구나. 내가 이다지도 어리석었던가….”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효형출판).

이상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고뇌해야 했던, 이상과 원칙이 현실과 변칙 앞에서 참담히 무너지는 비극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조선의 선비들. 그들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세상과 부대꼈던 그들의 내면세계를 짚었다.

작년 9월부터 반년 넘게 동아일보에 연재될 당시 기존 인물사상론의 한계를 극복한 시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거나 무심히 넘겼던 일, 또는 잘못 알고 있던 일들의 이면과 배후를 꼼꼼이 들여다 본다.

1906년 유배중이던 일본 쓰시마섬에서 단식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순국한 면암 최익현. 허나, 그는 굶어 죽지는 않았다.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시키는대로 하라”는 일본 군인의 겁박에 결연히 단식에 돌입했던 면암. 그는 그러나 어느날, “당신의 식비는 조선의 국왕이 보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묘사직을 섬겨야 하는 유림으로서 어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

낙향하는 퇴계를 붙잡고 선조가 물었다.

“지금 나라 안의 학자 중 누가 으뜸이오?”

“기대승은 학식이 깊어 그와 견줄 자가 드문가 합니다. 내성(內省)하는 공부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영남의 퇴계(이황)와 호남의 고봉(기대승). 두 사람은 서로 천리 밖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8년여에 걸쳐, 그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인 당사자들. 심성(心性)개념의 분석을 극도로 정밀하게 파고 들어갔던 이들의 논쟁은 조선시대 사상사의 찬란한 족적을 남겼다. 그런데도 퇴계는 왜 고봉을 일컬어 내성이 부족하다 했을까?

죽음에 이르러서도 “내가 죽거든 관을 두껍고 무겁게 하지 말고 얇게 하라. 먼길에 운반하기 힘들까 두렵다”라고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정암 조광조. 엄청난 질주(疾走)와 교만, 유아독존의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친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 정녕 개혁가에겐 절의와 죽음만이 최고의 가치이며 미덕인가?

한영우 정옥자 금장태 김충렬 최원식 김준석 정민교수…. 한국사 동양철학 국문학 각 분야의 여러 중진학자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때로는 굽이굽이,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역류하는 역사의 포효(咆哮)를 듣기도 하고 또 때로는, 수천길 낭떠러지로 낙하하는 역사의 외마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동아일보 이광표기자가 시대와 인간의 이면을 들추는 선비들의 뒷이야기를 곁들였다. 여기에 중진화가 김병종 황창배 이양원 화백의 그림. 말로는 다할 수 없었던 감동과 여운을 실어 조선 사상의 빛깔을 전해준다.

성정이 강개하고 학덕이 돈후하여 배타보다는 포괄, 분석보다는 화통을 추구했던 하서 김인후. 인종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와 인종간의 ‘묵계’는 어찌하여 역사의 빛을 볼 수 없었는가?

“조상 덕에 편안히 앉아서 죽이나 얻어먹는다면 이는 천지 사이에 하나의 좀벌레”라고 말했던 과거(科擧) 회의론자 반계 유형원. 그럼에도 그는 왜 여러차례 과거에 응시했을까?

나라의 멸망이라는 대파국 속에서 식민지 권력과 철저한 비타협의 길을 성성하게 걸어간 단재 신채호.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아나키스트인가? 진보적 사림파 남명학. 그 남명학은 왜 후세에 왜곡 폄하됐는가?

역사의 숨은 그림자, 율곡 이이의 아버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신사임당과 율곡이란 그 큰 인물 사이에서, 존재조차 희미했던 그는….

정옥자 금장태 이광표외 지음/효형출판 펴냄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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