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청준,전집1차분 출간기념 「문학기행」

  • 입력 1998년 4월 28일 07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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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남쪽으로 달려갈수록 그의 사투리도 시나브로 제 가락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작가 이청준(59).

오늘만큼은 깔끔한 양복과 넥타이에 결 고운 은발을 휘날리는 노신사가 아니다. 소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늙은 낚시꾼처럼 잠바에 랜드로버,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행색.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문단에 나선 지 33년, 환갑 한해 앞두고 시작한 자신의 전집발간 1차분 출간(열림원)을 조촐히 기념하는 남도기행. 편집위원을 맡은 후배문인 권택영 이인성 김경수 우찬제와 시인 신현림 등이 길벗으로 동행했다.

“고향말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 표준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도시내기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시골 출신의 자기방어벽 때문이었겠죠.”

국민적 규모의 판소리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는 영화 ‘서편제’의 원작자. 그러나 도심의 빌딩 숲에서 만나는 이청준의 이미지는 언제나 귀족적인 지식인이었다. 결코 일치될 수 없을 것같은 두개의 그림자 중 어느 것이 그의 모습일까. 고향 여행은 어떤 해답을 줄까.

이청준의 고향은 앞마당이 곧장 다도해인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마을. 봄빛을 받은 바다는 비늘 싱싱한 생선처럼 파닥인다. 그러나 젊어 한때 아름다운 고향은 그에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

그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사람이었다. 중학시절부터 마을의 자랑인 ‘광주유학생’이었지만 가세는 살던 집까지 팔고 나앉을 정도로 풍비박산났던 것.

대학입학을 위해 서울로 온 뒤 한동안은 남도사투리를 버렸다. ‘촌놈’으로 보였다가는 가정교사 자리도 얻기 어렵던 그 시절 서울. ‘살기 위해서 빨리 이 동네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존본능과 더불어 자라나던 세상에 대한 복수심. 그 ‘복수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작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시와 시골의 인간정신을 성장시키는 방식이 다르죠. 시골에서는 긴 설명이 없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은 뒤 울고 있는 그 개 주인 아이에게 굳이 고기를 먹게 하던 어른들. 그것이 시골에서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통과의례의 방식이라면 도시에서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주도면밀하게 학습시킵니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행복하게 통합되지 못한 채 갈등을 일으켰던 거지요.”

작가생활 초기 그는 도시에서 배운 방식대로 ‘유식하게’ 세상에 대해 이죽거렸다. 등단작 ‘퇴원’부터 ‘조율사’ ‘병신과 머저리’ ‘당신들의 천국’ ‘소문의 벽’ 등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세상이치에 회의하는 그의 초기작들에는 당연히 ‘지식인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런 그가 ‘서편제’로 시작되는 남도사람 연작을 끄적거리기 시작한 것이 76년. 고향을 떠난지 20여년만이었다. 도시에서 떠돌며 상처입는 동안 ‘부끄러운 기억’으로만 여겼던 고향에서의 체험들이 삶의 진솔한 모습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 뒤 어머니가 누워계신 무덤가 보리밭 자락에 앉아있으면 지금도 애잔한 타령이 귓가를 맴돈다. ‘서편제’의 ‘노랫소리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던 어머니의 이상스런 콧소리’는 바로 그늘하나 없는 땡볕속에 밭을 매던 작가 어머니의 것이었다. 눈 위에 난 어린 아들의 발자국을 되밟으며 “너만은 잘되거라” 축수했던 가난한 어머니(‘눈길’), 치매를 앓다 세상을 떠난 뒤 분열했던 가족들을 초상 마당에서 화합시켰던 어머니(‘축제’)는 평생 그의 글길을 함께 걸었던 셈이다.

지금은 뱃사람의 창고가 돼버린 옛날 초등학교 자리를 지날 때면 그는 전쟁 와중에 풍금을 떠메고 빨치산의 정훈장교로 입산했던 젊은 교장선생님을 떠올린다. 전쟁이 끝나자 선생님은 다시 찾을 수 없었고 생채기투성이의 풍금만 발견됐던 기억. 풍금을 치며 바닷가에서 아이들에게 보건체조를 시켰던 그 선생님이 정말 이념에 목숨을 걸었던 것일까. 그 해묵은 질문은 장편 ‘흰옷’(93년)을 낳았다.

어릴 적부터 그의 몸에 자장가로 휘감겼던 판소리가락을 뒤늦게 되찾은 뒤 그는 비로소 고향과 도시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채 떠돌아온 자신의 삶을 달래는 흐느낌을 발견했다. “이 세상과 인생사의 즐겁고 아름다운 것, 선하고 귀한 것뿐만 아니라 서럽고 추한 것, 악하고 천한 것을 모두 다 싸안는 것이 판소리이며 그것이 사람살이”라는 깨달음이다.

고향에 온 이튿날 이청준은 초등학교 동창이 몰아주는 배에 몸을 싣고 고향 앞바다로 나갔다. 집 앞 바다로 배를 저어나갔던 어린시절의 어느날, 세상에서 제일 높은 줄 알았던 마을의 ‘큰산’이 고만고만한 수많은 산 중의 하나인 것을 보고 ‘언젠가는 나도 저 산 너머 세상으로 나가겠구나’ 생각하며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물결위로 잔잔히 퍼진다. 그 산 너머 갔다 오는 잠깐 사이 어느덧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었다.

〈전남 장흥〓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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