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특별한 인연」함정임-구효서·김하기씨 책 발간

  • 입력 1998년 4월 20일 20시 35분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달랐겠죠.”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특별한 인연’을 간직한 두 작가. ‘그’와 만나고 헤어진 자리에 남은 깨달음을 책으로 펴냈다.》

▼남편 김소진잃은 함정임씨 소설집「동행」발간▼

97년을 맞는 소설가 함정임 김소진 부부는 빛나는 한쌍이었다.

그 전해 그들 부부는 나란히 창작집 ‘밤은 말한다’와 ‘자전거도둑’을 펴냈고 남편 김소진은 당시 문화체육부가 수여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까지 받았다.

두 사람의 신년 소원은 ‘둘째아기로 딸 낳기’.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벙글벙글 웃으며 다짐했다.

그러나 봄이 채 깊어지기도 전인 3월9일 김소진은 느닷없이 병석에 누웠고 4월22일 새벽 홀연히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미처 손써볼 시간도 없었던 암. 아내 함정임은 그 짧은 시간동안 두사람을 잃었다. 남편과 뱃속에서 힘겹게 숨을 잇던 아이.

청천벽력의 사건들이 휘몰아친 후 홀로 남은 함정임. 어린 아들과 홀시어머니의 ‘보호자’가 된 그는 눈물마저 짙은색 선글라스 속에 감춰야 했다.

그러나 남편이자 가장 열렬한 독자이며 둘도 없는 글벗이었던 김소진을 잃은 슬픔을 풀어내지 않고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의 호곡(號哭)은 글쓰기였다.

‘그와의 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매일밤 편지를 쓰며 대화를 하는 것만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며 그와 영원히 함께하는 길이었다.’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 발표한 중편 ‘동행’부터 ‘내 마음의 석양’ ‘말은 슬프다’ ‘그리운 백마’까지 김소진의 사후 쓴 4편 등 8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 ‘동행’(강 펴냄)과 함정임이 직접 편집한 김소진 산문집 ‘아버지의 미소’(솔)는 이렇게 탄생했다.

1주기인 22일 함정임은 고인의 벗들과 함께 두권의 책을 용인공원묘지에 누운 그에게 바친다.

소설을 쓰며 함정임은 자신의 아픔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김소진을 잃어 가슴 한곳이 비어버린 모든 이들의 기막힘을 그는 대신 울어준다.

“정임아 힘을 내거라. 슬퍼하지 마라. 우리도 잠시 이곳에 왔다가 가는 것 뿐이다”라는 다독임으로 마지막 순간을 예비하게 했던 은사 김윤식교수(서울대), 친구가 잠시 스쳐갔던 절터에서 그 혼이라도 붙들려는 듯 “소진아 소진아” 울부짖었던 평론가 정홍수, 불과 2년 사이에 아들들을 모두 잃고 “자식을 둘씩이나 잡아먹은 에미년”이라며 자책에 넋을 잃은 시어머니 철원댁, ‘고개를 길게 빼고는 누군가 거기 미처 오지 않은 사람이 있기라도 한듯’ 말없이 아빠의 그림자를 더듬는 네살배기 아들 태형….

그 모두의 슬픔을 가만히 안아 쓰다듬던 함정임은 이제 곁을 떠도는 남편 김소진의 혼을 이렇게 달랜다.

‘걱정마. 숨막힘도 어느 순간 트일 때가 있겠지. 회의와 절망은 살아가는 한 피할 수 없는 필연인 걸.’

▼「오남리이야기」의 구효서-김하기씨▼

57년 닭띠 구효서와 58년 개띠 김하기. 두사람이 지금껏 걸어온 길은 ‘평행선’같은 것이었다.

78년 대학에 입학했던 두사람. 구효서는 대학생활을 맛볼 새도 없이 군에 입대해 그곳에서 10·26과 12·12, 5·18을 맞았다.

동갑내기들이 스크럼을 짜고 시가지를 누빌 때 구효서는 “새벽녘 곤히 잠든 이의 이불을 군홧발로 짓밟으며 누군가를 연행해오는” 계엄군이었다.

반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반(反)유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김하기. 5·18 직후 계엄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한 뒤 강제징집됐다.

그러나 군생활도 평탄치 못했다. 시국사건에 연루된 자신을 잡으러오는 군 보안대를 피해 탈영을 감행한 것.

89년 작가로 데뷔한 김하기는 2년 앞서 등단한 구효서의 작품을 유심히 읽었다. 작품세계도 다르고 풍문으로만 서로의 존재를 알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96년 초여름. 북한산 자락 보신탕집에서 열린 ‘소설가모임’에서였다.

“형 문장이 참 좋더라.”(김하기) “나도 네 얘기는 많이 들었다.”(구효서) ‘오래된 연인’처럼 순식간에 마음을 터놓았던 두 사람.

그러나 두번째 만남은 서울구치소 면회실이었다. 97년 여름 중국여행중이던 김하기가 술김에 북한으로 넘어가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된 것.

난생 처음 구치소를 방문해 높은 담 저편에 김하기를 두고 나오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구효서.

‘위문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번에 2백자 원고지 70,80장을 헤아리는 긴 편지.

“지난 번 면회갔을 때 참기름도 한병 넣었지. 나도 그날 집에 와서 찬밥에 김치 송송 썰어넣고 참기름 대여섯방울 떨어뜨려 널 생각하면서 그걸 먹었어. 꾸역꾸역.”

“니 편지글 첫번째 문장에 ‘여기는 사우나 한증막’이라고 썼던 거 기억해? 나도 더웠지만 그 문구를 읽는 동안만큼은 더위가 가시더라.”

“효서형의 편지를 받는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습니다. 저와 다르게 살았던 사람, 그래서 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같던 사람의 따뜻한 격려였으니까요.”(김하기)

구효서는 그 ‘위문편지’를 계간지와 PC통신 등에 발표했다. ‘김하기라는 작가가 아직 이렇게 감옥에 있습니다. 그를 잊어버리지 맙시다’하는 마음에서였다.

김하기는 3월13일 새 정부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두사람은 ‘오남리이야기’(열림원)라는 단행본으로 발간될 위문편지 6통의 인세를 이번 사면에서 제외된 시인 박영희에게 보내기로 했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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