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만화 性의 반란…순정탈피 대담한 「여성의 性」묘사

  • 입력 1998년 2월 24일 19시 51분


여성의 노골성은 남성의 그것을 능가한다? 멍석만 깔려 있다면. ‘여성만화=순정만화’ 등식이 깨지고 있다. 여성 만화가들이 그리던 서구적 마스크의 호리호리한 ‘9등신’ 주연 캐릭터가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의 등장공간도 더 이상 상상이나 신화의 세계처럼 ‘먼 그곳’이 아니다. 일상의 변두리에서 ‘성(性)’과 ‘여성의 몸’이라는 리얼한 주제를 대담하고 솔직하게 엮어간다. 표현방식도 현실만큼이나 거칠고 투박하다. 여성에 대한 환상은 더 이상 없다. 비주류 신세대여성만화를 주도하는 이들은 문흥미 장현실 이애림 최인선 이진경 노경애 이빈씨 등 30대를 전후한 10여명의 작가들. 성인여성 만화월간지 ‘나인(Nine)’, 웹진 ‘믹스(Mix)’, 계간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if)’ 등이 이들의 주 활동 무대. 여성의 성.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 전제. 장현실씨가 지난해부터‘if’에 연재 중인 ‘색녀열전(索女列傳)’의 첫회 ‘개화(開花)’는 자연스럽게 성욕에 눈뜨는 여성을 다뤘다. 첫날밤 신부가 ‘능숙하다’는 이유로 소박맞을 위기에 처한다. 신부가 보내온 편지를 통해 ‘여자도 때가 되면 자연스레 성에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랑이 신부를 다시 받아들인다는 내용. 장씨는 “순종적이지도 정숙하지도 않은 민담 속의 여인상을 통해 여성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애림씨는 단편만화 ‘세이 애니띵(Say Anything)’에서 성숙한 남성과 성숙한 여성을 성적 욕망을 지닌 ‘음흉하고 음탕한 동물들’로 묘사한다. 여성의 몸. 표현방식에 어떤 금기도 주저함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 가냘프고 아름답기만한 남성의 성적 대상물로서가 아니다. 최인선씨는 단편만화 ‘바스트’에서 ‘가슴이 큰 여자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대중탕에서조차 자신의 젖가슴을 조몰락거리는 여성(만지면 커진다는 생각에서)’을 등장시킨다. 이애림씨의 단편만화 ‘미스 구드롱’의 주인공 구드롱양은 울퉁불퉁하고 거친 살결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된다. 왜 이런 만화를 그릴까. “실재하는 세계를 그대로 그리다 보니 기존의 만화와 다른 모습이 됐을 뿐”이라고 이들은 대답한다. 언뜻 보면 그들의 관심은 페미니스트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정작 이들은 어떤 ‘주의(主義)’에도 무관심하다. 그저 ‘작가의 주장’을 종이 위에 옮겨가고 있을 뿐이란다. 작가들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꾼 몸’을 역설적으로 거부하는 셈이다. 이런 시도는 ‘여성으로서의 정체감을 찾아가는 첫걸음’이란 설명. 비주류 여성만화의 재미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시각예술인 만화를 그리면서도 이들 작품의 무게는 이야기와 구성쪽에 실린다. 솔직하긴 하지만 씁쓸한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나오는 어이없음, 비감, 그리고 O 헨리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극적반전이 숨어 있다. 최인선씨의 ‘바스트’에서는 가슴이 큰 ‘여자’가 남성의 흠모를, 여성의 부러움을 사지만 결국 고양이를 가슴에 넣고 다니는 예쁘장한 남자임이 들통난다. 문흥미씨의 ‘쇼킹 뷰티’에서는 보습효과가 있는 화장품을 바른 얼굴에서 화초가 무럭무럭 자라난다. 만화평론가 박인하씨는 여성 만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화문화의 성숙에 따라 독자층이 넓어짐으로써 생겨난 변화로 설명한다. 작가는 읽는 이가 요구하는 작품을 공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하지만 이런 추세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그는 “만화는 대중문화다. 폭넓은 독자층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준비’돼 있지 않다면 이는 하나의 시도로 끝날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이나연기자〉 ▼ 남성 만화가 양영순씨 신랑친구 중 선발된 ‘숏다리’ 함진아비는 신부의 아버지가 깔아주는 돈봉투에도 걸음을 떼지 않는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섹시한 여인. 신부 아버지에게서 돈봉투를 받아챙기더니 함진아비 앞에 속옷을 벗어 던진다. 눈이 벌개진 함진아비. 계속 날아오는 속옷을 밟으며 신부집으로. 만화가 양영순씨(27)의 만화집 ‘누들 누드’의 한 장면이다. 요즘 대학생 사이에 ‘누들누드’를 모르면 ‘간첩’. ‘누들누드’는 격주간 성인만화잡지 ‘미스터블루’에 95년 중반부터 지난해말까지 연재됐다. 중간중간 단행본으로 엮어 나와 대여순위 1위, 성인만화 초유의 10만권 판매를 기록했다. ‘세미포르노’ ‘명랑포르노’라 불리는 그의 만화에 대한 평가는 다채롭고 화려하다. “어느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혹성이 지구에 부딪쳐 깨어지자 그 속에서 나타난 괴물”(시사만화가 박재동씨),“우리 머리 속에 똬리틀고 있는 낡은 성의식과 감추어진 욕망을 발가벗기는 놀라운 상상력”(문화평론가 김창남교수) 등. 그 자신은 ‘누들누드’의 성가를 ‘거품’으로 치부한다. 국민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그는 90년대초 만화아카데미에 재학하면서 포르노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그냥 끌리고 관심이 가는 주제를 다뤘던 겁니다. 하루종일 방안에서 뒹굴며 하게 되는 성적 상상을 과장하고 비유해 종이에 옮기는 거죠.” 평범한 일상의 사건에서 ‘판튀듯’ 성의 이야기로 번져가는 엉뚱한 상상력이 그의 장기. ‘18세미만 구독 불가’라는 빨간딱지가 붙었지만 그의 만화에서 노골적 성애나 음습한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양씨는 ‘누들누드’ 4권을 끝으로 당분간 포르노는 그리지 않을 생각이다. 다른 금기에 도전하기 위해서. “악마의 문제, 폭력 등이 되겠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이상심리나 비도덕적 욕망은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얌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박중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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