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근본’입니다. 동아일보가 1월 1일부터 전면 가로쓰기와 섹션 발행으로 크게 변화하면서도 제호(題號)만은 기존의 한자 제호를 계속 사용하는 것도 그같은 뜻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제호는 78년의 역사 속에 동아일보가 변함없이 지켜온 사시(社是)인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창간정신 담겨있어 ▼
원로 법조인이자 동아일보의 산 증인 중 한 사람인 기세훈(奇世勳·83)씨는 동아일보가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면 가로쓰기 등 지면의 일대 변혁을 단행하면서도 한글 제호를 쓰지 않고 ‘東亞日報’라는 한자 제호를 그대로 유지한 것을 ‘본말(本末)’에 비유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사 내용이나 스타일, 조판형태 등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겠지만 ‘근본’은 살아 있어야 하는데 제호야말로 동아일보의 창간정신과 민족정신을 담은 ‘근본’이라는 설명이다.
‘東亞日報’는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1871∼1936)선생이 상형문자에 가장 가까운 전서체(篆書體)로 쓴 제호로 창간 때부터 사용해왔다. 한자의 시발격인 전서체는 ‘근본’ ‘정중’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우리 글은 표의(表意)문자인 한자와 표음(表音)문자인 한글로 이뤄져있습니다. 이중 75% 정도는 한자입니다. 두 문자를 같이 쓰면서 우리 문화가 발전해 왔는데 요즘 신세대들은 한자를 너무 몰라 안타깝습니다. 우리전통문화를 담아온 그릇인 한자를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문화의 참 뜻과 맛을 모른다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기씨는 “이 때문에 한글세대는 한자에 관한 한 문맹세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이는 모든 것을 너무 쉽고 편리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씨는 “중국이나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도 한자교육을 잠시 소홀히 한 결과 문화발전에 적지않은 지장을 초래한 역사적 전례가 있었던 만큼 창의력과 응용력을 길러주는 한자교육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북한도 68년 한자교육을 부활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를 창간호부터 정성스레 모은 선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동아일보와 함께 성장했다는 기씨는 대대적으로 탈바꿈한 동아일보에 독자로서 세가지를 주문했다.
“첫째는 엄정중립을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이번 대선을 보면서 절실히 느꼈지만 신문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합니다. 다음은 사설인데 국가 사회의 변천을 진심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훌륭한 칼럼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필봉(筆鋒)은 1백만 대군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기씨는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신문 본래의 기능이자 동아일보의 전통”이라며 “자타가 공인하는 민족지 동아일보가 외형적인 모습은 달라지더라도 이런 본래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문이 제 역할을 다할 때에라야 ‘사회교육의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 정론지 전통 이어가길 ▼
“동아일보는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1929년 일본 도쿄에 머물면서 쓴 ‘동방의 등촉’이라는 시를 정말로 어렵사리 게재,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살던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동아일보는 민족정론지로서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한국 언론의 등촉이자 한국 사회의 등촉이 되어야 합니다.”
기씨는 일제시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법조생활을 시작,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냈다. 3선개헌 반대로 법복을 벗은 뒤 변호사로 활동했고 90년부터 인촌(仁村)기념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양영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