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난국에서 주화론 척화론으로 극명하게 대립했던 최명길과 김상헌. 그들은 17세기 최대 라이벌이었다.
모두 서인계열로 처음엔 비슷한 길을 걸었다. 광해군 말기, 최는 현실을 중시하는 양명학에 빠졌고 김은 명분과 의리를 숭상하는 주자학에 몰두하면서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이들이 정치노선의 차이를 드러낸 계기는 인조반정. 최명길은 반정에 참여해 공신이 됐고 김상헌은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가담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 서인이 세력을 얻자 이들은 별 탈없이 성장을 거듭했다.
그것도 잠시뿐. 병자호란은 그들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최명길은 주화를, 김상헌은 척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당시 절해고도(絶海孤島)와도 같았던 남한산성에서 최가 항복문서를 만들어 청군 진영을 오갈 무렵, 김은 문서를 빼앗아 찢어버렸고 최는 그것을 주워서 다시 붙이곤 했다.
최는 전후 처리를 위해 청에 드나들었고 김은 척화파였다는 이유로 청나라 선양(瀋陽)에 잡혀갔다. 얼마 후 청나라 복수 계획을 꾸민다 해서 최도 역시 붙잡히는 신세가 됐다. 역사의 라이벌, 그들은 차가운 이역땅에서 포로의 몸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 만남은 그들에게 서로를 이해하는 기회가 됐다. 최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김의 의연함에 탄복했고 김도 최의 주화론이 진정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김은 「두 세대의 좋은 우정을 찾고/백년 묵은 의심 풀리도다」고 읊었고 최는 「그대 마음 돌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고/…」라며 김의 절의를 칭송했다.
이들은 화해했건만 후손들은 그 명암이 뒤바뀌었다. 주화파(실리론) 최명길의 후손은 소론이 되어 정치적 힘을 상실한 채 강화도에서 양명학파를 형성, 외로운 현실비판의 길을 갔다.
반면 척화파(명분론) 김상헌의 후손은 노론이 되어 세력을 잡고 훗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까지 이어졌다. 조선이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한 사회였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