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3시경 서울 노원구 중계동 H오락실.
기말시험 기간이라 일찍 하교한 듯 60여명의 학생들로 발디딜 틈 없이 붐빈다. 최고 인기 게임은 「패왕전설」.
「상대의 몸뚱이를 향해 칼을 사정없이 휘두른다. 팔이 잘려나간다. 화면 가득 번지는 시뻘건 피. 기세를 몰아 목을 베어버린다」.
비슷한 시간 강남구 청담동 K만화방. 자리를 빼곡이 채운 중고생들은 너나 할 것없이 일본만화책을 손에 쥐고 있다.
「남자의 바다」 「대두목」 「캠퍼스 파이터」 「파워클럽」.
페이지마다 잔인한 장면이 이어진다. 폭력조직간에 무자비하게 펼쳐지는 칼부림, 서슴없이 펼쳐지는 살인 등등…. 마약 섹스도 빼놓을 수 없는 소재.
이날 오후 5시경 용산전자상가.
교복차림의 고교생 3명이 바삐 움직였다. 여자들을 찾아 다니며 성폭행을 일삼는 악당을 저지하는 게임을 사기 위한 것. 이모군(16)은 『하지만 대부분 일부러 악당을 막지 않아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성인용 음란CD롬 2장이 담긴 봉투를 한 손에 든 채….
오늘의 10대들은 이처럼 어디서나 각종 불량 영상매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가정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물리적 폭력에다 언어폭력까지 판을 치는 TV프로그램들 때문. 또 입맛대로 골라볼 수 있는 비디오가 동네 비디오방에 널려 있다.
YMCA시청자 시민운동본부 李承庭(이승정·40)실장은 「14세가 될 때까지 TV에서 1만1천건의 살인사건을 본다」는 미국의 한 연구결과를 예로 들면서 『TV의 폭력성 선정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되면서 청소년들의 정서를 파고 들기 때문에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CF도 마찬가지.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李明天(이명천)교수는 최근 CF의 경향으로 △급속한 화면변화 △속도감 추구 등을 꼽으면서 『CF에 가장 민감한 청소년들이 이런 화면을 보면서 자연히 조급한 성격이 형성된다』고 말했다.
「80년대 키드」들이 영상매체에 무비판적으로 쉽게 빠져드는 것은 개인주의가 만연함에 따라 집단놀이문화를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
서울대 교육학과 李星珍(이성진)교수는 『서로 몸을 부딪쳐가며 놀던 과거의 놀이문화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규율 질서 책임감 도덕심 등을 자연스럽게 익혔다』며 『비디오 키드들에게는 그런 덕목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처럼 영상매체가 청소년들의 정서를 크게 지배함에 따라 『학교나 가정보다 더 큰 스승은 TV』라는 우려가 심각하게 제기된다.
지난 94년 드라마 「모래시계」가 안방을 점령할 당시 서울시내 모 중학교 교사는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장래희망을 조사했다. 이 교사는 이중 한 학생이 『깡패두목이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보고 『참 놀랍고 당혹스러울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최근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은 서울 D중학교 3년 박모양(15)의 고백은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생님이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전반적으로 설교조의 수업이었어요. 차라리 TV나 비디오에서 더 배울 게 많아요』
〈금동근·이승재·이명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