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가을 고추밭서 느끼는 나눔의 정

  • 입력 1996년 10월 27일 20시 39분


며칠전 날씨가 추워지면서 찬이슬이 내리자 집앞 고추밭 주인이 고추를 다 따갔다. 늦게 달린 고추가 서리맞아 떨어지기 전에 따서 고추장아찌도 담고 어린 풋고추는 조림도 하고 쪄서 무쳐먹기도 하기 위함이다. 고추밭 주인은 먼저 따가고 남은 것을 동네 사람들 보고 따 먹으란다. 옆집 앞집 모두 커다란 소쿠리를 갖고 나와 고추를 따느라 난리였다. 나는 그날 바쁜일이 있어 못따고 이튿날 혹시나 하여 소쿠리를 들고 고추밭으로 나가봤다. 그랬더니 바닥에 떨어진 고추가 제법 많았고 고추나무에도 아직 많이 달려 있었다. 작은 소쿠리로는 모자라 비닐봉지에도 가득 채웠다. 허리가 아픈 줄도,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따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가을에 수확하고 가난한 사람이 먹도록 이삭을 남겨둔 인심 덕택이었다고. 그날 저녁밥을 지으며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고추만을 골라 밀가루를 뿌려 찐 뒤 참기름에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놓으니 얼마나 먹음직한지 모른다. 저녁 밥을 먹으면서 아이들 보고 『얘들아, 이 고추무침 너무너무 맛있다. 어서 먹어봐』했더니 아이들은 그 매운 고추를 어떻게 먹느냐며 외면한다. 옆에 있던 남편이 보기가 딱했던지 한개 집어 먹어보더니 『야 정말 맛있다』했다. 큰 딸이 조심스럽게 먹어보더니 『엄마, 정말 맛있네. 고추도 맛이 있구나』하면서 다음날 도시락에 넣어 달란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다음날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었더니 반아이들도 아주 잘 먹더라며 반찬통을 깨끗이 비워왔다. 그리고 불긋불긋 익은 고추는 따로 골라서 부각도 만들고 햇볕에 말렸다가 냉동실에 넣어두고 겨우내 된장찌개에 넣고 통통한 푸른 고추는 장아찌를 담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올가을은 왠지 푸근한 감이 든다. 이게 바로 농부의 마음인가 싶다. 최 명 순(서울 마포구 상암동 산26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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