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스웨덴 빅토리아 공주와 평민출신의 남편 대니얼 베스틀링. 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 패션은 그를 유럽 왕가를 대표하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꼽히게 했다.
프랑스의 멋쟁이왕 루이 14세를 최초의 트렌드 세터로 꼽는 패션 전문가들이 있다. 피라미드식으로 전파되는 트렌드 공식에 따라 왕의 취향이 왕비와 왕가, 귀족 사회, 심지어 평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수 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품 패션 및 보석 브랜드들의 기반 역시 왕가, 그 가운데서도 유럽의 왕가인 경우가 많다. 프랑스 주얼리 브랜드 까르띠에의 홍보 문구는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Jeweler to kings, king of jeweler)’이고 역시 프랑스 주얼리 브랜드인 쇼메는 브랜드 스토리를 논할 때 나폴레옹 시대, 왕실 전용 보석상으로 지정됐음을 빼놓지 않는다.
왕과 왕비는 오랜 세월 동안 당대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이었고 대중은 화려한 이들의 모습을 동경했다. 왕가의 여인이 대중적인 스타일 아이콘으로 추앙받은 가장 최근 사례는 고인이 된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식 때 그가 입은 데이비드&엘리자베스 엠마누엘의 웨딩드레스, 첫 공식석상에서 선보인 블랙 드레스는 동시대를 살았던 젊은 여성들의 모방 본능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왕가에 쏠리던 관심과 로망의 대상은 이제 미국의 미셸 오바마, 프랑스의 카를라 브루니 같은 퍼스트레이디들로 옮겨왔다.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 이후 유럽 왕가는 뚜렷한 패션 아이콘 없이 표류한 셈이다.
그렇게 썰렁했던 유럽 왕가가 최근 두 명의 여성 덕에 활기를 되찾게 됐다. 이들은 대중적인 스타일 아이콘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첫째 스타일리시할 것, 둘째 예쁠 것, 셋째 대중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
스웨덴의 왕위 계승권자 빅토리아 공주 결혼식에 참석한 모나코 국왕 앨버트 공과 약혼녀 샬린 위트스토크. 사진제공 로이터 연합뉴스.
▶ “내 남자는 내가 골라”… 빅토리아의 자신만만 패션
첫 번째 주인공은 지난 달 19일 결혼식을 치른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32)다. 성별에 상관없이 장남 또는 장녀가 왕가를 잇는 스웨덴 왕실 규율에 따라 칼 구스타프 16세 국왕을 이어 스웨덴을 통치하게 될 이 공주는 자신의 헬스 트레이너였던 시골뜨기 대니얼 베스틀링(36)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유럽은 물론 일본, 중동 등에 포진한 전 세계 왕족과 핀란드, 아이슬란드 대통령 등 하객 1200여명이 참석하고 약 5억 명의 세계인들이 TV로 시청한 이날 결혼식은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비의 결혼식 이후 최고의 유럽 왕실 행사로 기록됐다.
베스틀링은 ‘남성판 신데렐라’이다. 빅토리아 공주가 8년 전 섭식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스톡홀름의 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시작하면서 만난 이들은 국왕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다. 왕가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더벅머리 총각, 베스틀링은 구스타프 국왕이 역사, 매너, 외모 관리 등의 전문가를 붙여 제공한 ‘특별 훈련’에 힘입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왕족인 것처럼 교양 있는 모습으로 둔갑했다.
어려운 사랑을 쟁취한 빅토리아 공주는 미국 예일대를 거쳐 스웨덴 웁살라대를 졸업했다. 파파라치 컷을 통해 공개된 그의 평상시 모습은 뿔테 안경에, 미용보다는 기능을 중시해 자연스럽게 말아 올린 머리 등 ‘모범생’ 스타일.
물론 각종 사교 행사에서 선보인 우아한 드레스룩과 지적인 매력이 묻어나는 미모가 간간히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스타일 아이콘으로서 그의 ‘데뷔 무대’는 역시 이번 결혼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빅토리아 공주는 수상의 주재로 열린 웨딩 리셉션에서 ‘엘리 사브’의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입었다. 라일락색 드레스는 오간자 소재 꽃잎과 구슬로 화려하게 장식됐다. 레바논 출신의 디자이너 엘리 사브는 화려하고 우아한 디자인으로 유럽과 중동의 부호들로부터 각광받는 인물이다. 수차례 가봉을 통해 완벽하게 몸에 맞는 드레스를 만들기 때문에 왕가의 여인들은 그의 의상실에 전용 가봉 마네킹(자기 몸과 똑같은 치수의 마네킹)을 갖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톡홀름 성당에서 열린 본식에서는 스웨덴 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를 선택했다. 그의 어머니 실비아 왕비가 크리스찬 디올의 드레스를 입고 결혼했고 왕비와 그의 스타일리스트가 최근 파리를 방문해 몇몇 명품 브랜드 매장을 들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초 프랑스 브랜드가 간택될 것이라는 전망도 높았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주장에 따라 평소 스웨덴 왕가 여인들의 드레스를 자주 제작해온 파 잉셰덴이 최종 낙점됐다. 그가 제작한 웨딩드레스의 하이라이트는 무려 16.5피트(약 5m)에 달하는 트레인. 두 명이 함께 운반해야 할 정도로 긴 트레인을 늘어뜨리며 결혼식장으로 입장하는 빅토리아의 모습에서는 부정하기 힘든 ‘왕실 아우라’가 느껴졌다.
결혼식날 공주가 쓴 티아라도 화제가 됐다. 티아라의 원래 주인은 1976년 6월19일, 딸과 같은 날짜에 결혼식을 올린 실비아 왕비. 그는 큰 딸을 위해 자신이 결혼식 때 썼던 티아라를 기꺼이 물려줬다. 이 티아라의 한가운데 부분에는 큐피드와 그와 사랑을 나눈 프시케가 새겨진 카메오 장식이 붙어 있다. 앤티크 주얼리와 모던한 드레스, 슈어홀릭의 로망 ‘로저 비비에’ 웨딩 슈즈가 어우러진 웨딩드레스 패션은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공주의 결혼식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는 평가다.
빅토리아 공주는 결혼식에 평소 친하게 지내는 대형 의류 업체 H&M 칼 페손 회장을 초청했다. 그가 스웨덴을 대표하는 패션계 인사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빅토리아 공주가 패션 아이콘으로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도 된다.
페손 회장은 샤넬의 크레이티브 디렉터 칼 라거펠트, 톱스타 마돈나 등과 함께 디자인한 상품을 선보이는 등 전 세계 패션계의 거장, 또 스타들과의 인맥을 자랑하는 패션업계 거물이다.
빅토리아 공주가 유럽 왕실을 대표하는 패셔니스타로서 눈도장을 찍게 된 결혼식은 정작 스웨덴 국민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다. 20만 명의 관중과 4만개의 장미 등을 동원해 며칠 동안이나 진행된 결혼식에 무려 2백만 유로(약 30억원)의 혈세를 쏟아 부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독일, 영국 등 이웃 유럽국가 언론은 빅토리아 공주가 침체된 분위기의 스웨덴 왕실에 끼친 홍보효과가 상당하다고 분석했다.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와의 특별한 친분을 자랑하는 샬린 위트스토크는 웨딩 드레스 역시 '아르마니 프리베'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 제2의 그레이스 켈리, 완벽한 샬린
유럽 왕실의 스타일을 선도하게 될 또 한 명의 주인공은 모나코의 국왕 앨버트 공(52)과 지난 달 23일 약혼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국가대표 수영선수 샬린 위트스토크(32)다.
두 사람이 결혼식에까지 골인하면 앨버트 공의 어머니, 그레이스 켈리의 사망 이후 약 30년간 공석이던 모나코 왕실의 안주인 자리가 비로소 채워지게 된다.
앨버트 공과 위트스토크는 수영으로 맺어진 커플이다. 2000년 모나코에서 수영챔피언십 경기가 열렸을 때 당시 모나코 수영연합회장이었던 앨버트 2세 왕자가 선수로 참가한 위트스토크와 사랑에 빠진 것. 20년의 나이차를 극복한 이들은 2006년 도하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공식 커플’로 인정받았다.
위트스토크는 켈리의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하는 우아한 미모와 수영으로 다져진 완벽한 몸매로 이미 유럽 패션지들이 꼽는 차세대 스타일 아이콘으로 추앙받고 있다.
모나코 왕실이 공개한 이들의 약혼식 발표 사진 속에서 그는 하늘색과 녹색이 섞인 홀터넥 드레스를 선보였다. 스위스 브랜드 ‘아크리스’ 제품인 이 드레스는 다소 넓지만 여성스러운 그의 어깨라인과 아름답게 발달한 가슴라인을 더욱 부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약혼반지도 함께 화제가 됐다. 앨버트 공이 선물한 ‘레포시’의 브릴리언트컷 다이아몬드 반지는 회색빛이 도는 금으로 세팅됐다. ‘레포시’는 1997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다이애나와 연인 도디 알파예드의 약혼반지로도 유명하다.
그가 결혼식에서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도 벌써부터 관심거리다. 현재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것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르마니 프리베’ 라인. 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 때도 그는 프리베 라인의 뷔스티에 드레스를 입었다. 아르마니 프리베는 요르단의 라니아 알 압둘라 왕비, 벨기에의 파울라 왕비와 마틸다 공주 등에 두루 사랑받는 ‘공식 왕실 드레스’ 같은 존재다. 빅토리아 공주의 결혼식 때 하객으로 참석한 왕가 여성들의 드레스를 분석한 패션전문사이트 패션&런웨이닷컴은 이날 하객 패션 트렌드를 ‘아르마니 프리베’로 압축하기도 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각별한 사이인 위트스토크 역시 웨딩드레스로 아르마니 프리베를 선택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패션잡지 인스타일은 그의 드레스 선택이 그가 모나코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될 것인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첫 시험무대가 될 것이라며 평소 그와 잘 어울리는 것으로 검증된 홀터넥 또는 원숄더 드레스를 권하기도 했다.
위트스토크의 웨딩드레스에 벌써부터 큰 관심이 쏠리는 이유는 시어머니 그레이스 켈리 때문이기도 하다. 켈리는 1956년 거행된 결혼식 때 당시 소속사였던 영화사 MGM의 전속 의상디자이너 헬렌 로즈가 디자인한 하이넥(high neck)스타일 드레스를 입었다. 상의를 완전히 가리는 단아한 스타일이 특징. 90m에 달하는 망사 천으로 제작된 그의 웨딩드레스는 그가 출연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빅토리아 공주와 위트스토크는 국가 이미지를 높여줄 홍보대사가 될 전망이다. 그리고 이들의 홍보 전략은 왕가에 합류한 이후 자신이 출연한 모든 영화를 모나코에서 상영하지 못하도록 한 그레이스 켈리의 ‘폐쇄적 방식’이 아닌 다이애나식의 ‘공개적 방식’이 될 전망이다.
1990년대까지 옷은 물론 화장법, 액세서리, 헤어스타일에까지 걸쳐 전 세계적인 트렌드 세터였던 다이애나는 특히 30, 40대 여성들의 스타일 롤모델로 꼽혔다.
왕가의 여인들은 요즘 퍼스트레이디들처럼 젊은 신인 디자이너들을 대거 활용한 트렌디한 패션을 선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클래식 패션에는 왠지 모를 막연한 동경심과 호기심을 갖게 된다. 노력만으로 이르기 힘든 자리를 차지한 이들을 향한 ‘평민 콤플렉스’ 때문일까.
혈통끼리 엮여 있어 따지고 보면 다들 먼 친척관계라는 유럽 왕실에서 자주 만나게 될 이 두 여인 가운데 어떤 이가 더욱 더 빛나는 스타일 아이콘이 될지 지켜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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