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홍래/아르헨 사태에 교훈있다

  • 입력 2001년 12월 25일 17시 42분


연말 국내외 금융시장이 불안하다. 일본 엔화가 보름 전부터 하락을 거듭하더니 아르헨티나의 외채지불유예(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충격이 더해지고 있다. 모처럼 활기를 띠던 국내 증시도 주춤거리고 있다. 회복과 신뢰에 대한 희망으로 새해를 맞으려는 가슴에 불안감이 스며들고 있다.

▼국민 고통분담 자세 중요▼

아르헨티나와 한국 경제의 인연은 그다지 깊지 못하다. 직접무역도 많지 않을뿐더러 국내 금융기관의 금융채권과 직접투자도 모두 합쳐 2억달러에 불과해 이번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받을 직접적인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더구나 세계금융시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진작 예견되어 왔던 터라 국내증시에 주는 충격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사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은 산업구조, 정치역정, 경제운용, 그리고 위기 대응방법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아르헨티나에는 뾰족한 제조업 기반이나 경쟁력을 갖춘 첨단산업이 별로 없다. 농업과 축산업, 광업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1차산업이 주력이다. 이들 산업의 경쟁력 원천도 첨단기술이 융합되어 나타난 고부가가치화가 아니라 대량생산에 의한 가격경쟁력이다. 그래서 페소화 환율이 좀 오르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달러화에 고정되어 경상수지 개선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둘째, 아르헨티나의 정치는 대중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중의 절대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대중을 빈곤하게 만들었던 페로니즘의 원산지다.

셋째, 아르헨티나의 경제정책은 고통분담을 실천하지 못했다. 페로니즘의 정치 전통 속에서 정권을 오래 유지하려면 현명한 국민의 지지가 아니라 감성적인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후안 페론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낸 군사독재정권이나 민주화와 자유주의 개혁을 기치로 내건 80년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도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결단력 있는 정책을 오래 밀고 나가지 못했다. 결과는 누적된 재정적자,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그리고 우선 순위에서 방향을 잃은 경제정책이었다.

넷째, 아르헨티나 정부는 안일한 자세로 위기에 대처했다. 길게는 80년대부터, 짧게는 지난 1, 2년 동안 경제위기에 대한 아르헨티나 정책당국의 대처는 미봉책에 그치거나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통화가치의 안정과 페소화로 표시된 외채부담 경감을 위해 고정환율제를 도입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경상수지 악화와 실업 증가에는 대처할 수 없었다.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이는 다시 경제위기를 부르는 악순환 구조가 고착되었다.

여기에 미봉책으로만 일관하는 안일한 대처로 인해 최근에는 아르헨티나를 도와주려는 국제통화기금(IMF) 마저 실망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같은 아르헨티나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문제에는 공짜가 없다는 고통분담의 자세를 일반 대중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부의 리더십과 빈부격차의 해소가 없이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경제에 구조조정이 중요하면서도 사회통합력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 리더십 키워야▼

그리고 정치권의 지원 속에 일관성 있는 정책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국가 경제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지속성장을 가능케 하는 산업 구조를 구축해야만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은 비단 아르헨티나의 사례를 떠나서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과 100년 전, 배고픔에서 벗어나려고 신세계로 향하던 유럽 이민들은 미국과 함께 아르헨티나를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꼽았다. 1919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남반구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독일의 히틀러는 자신의 제3제국을 아르헨티나에서 재건하고 싶어했다. 1970년대에는 농업이민의 꿈을 안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향하던 희망의 땅이 아르헨티나였다. 그러나 지난 세기 희망의 땅 아르헨티나는 21세기 벽두인 이제 한국경제를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 노릇을 하고 있다.

조홍래(현대경제연구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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