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2차대전, 프로킬러의 대결<에너미 앳 더 게이트>

  • 입력 2001년 5월 10일 18시 50분


“사슴사냥하던 독일 귀족과 늑대잡이하던 우랄 청년의 대결, 이건 나라간의 전쟁이 아니라 계급간 대결이야.”

영화속의 이 대사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가 어떤 영화인지 잘 설명해준다.

‘연인’ ‘티벳에서의 7년’을 만든 프랑스의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연출한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서사적 규모의 대작. 그러나 전쟁은 배경그림일 뿐, 서로를 죽여야 하는 두 남자의 대결이 중심에 놓인 영웅담이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 가담한 소련군과 독일군의 격전지였던 스탈린그라드. 탁월한 사격솜씨를 지닌 소련군인 바실리(쥬드 로)는 선전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의 눈에 띄어 나찌 장교를 처단하는 저격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

바실리가 연일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자 독일군은 저격수학교 교장인 코니그 소령(에드 해리스)을 투입한다.

유럽에서 만들어진 영화 중 최고의 제작비(8400만 달러)를 들인 이 영화에서 수백명의 소련군인들이 독일군의 공중 폭격 속에서 볼가강을 건너는 초반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사실적인 전투장면으로 꼽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 장면과 비견될 만하다.

전쟁의 아수라장을 묘사하는 동안에도 바실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던 카메라는 ‘영웅 바실리’의 탄생 과정을 보여준 뒤 바실리와 코니그 소령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 속으로 보는 이들을 데려간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눈동자의 클로즈업만으로도 바실리와 코니그 소령의 육감과 긴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노련한 솜씨를 보여준다. 백화점 건물과 공장의 잔해를 배경으로 바실리와 코니그 소령이 대치하는 장면들은 마치 싸움의 규칙을 잘 알고 세련된 기교를 구사할 줄 아는 고수들의 대결같다.

바실리와 코니그 소령의 캐릭터 차이도 매력적이다. 코니그 소령은 바실리를 죽여야 하면서도 그의 존재를 즐기는 냉정한 프로페셔널. 반면 바실리는 강력한 적을 만난 뒤 어릴 때 실패했던 늑대사냥에 대한 악몽을 꾸며 감정적 동요를 겪는다.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는 자의 침착함과 순진한 열정이 동시에 교차하는 표정의 쥬드 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눈빛의 에드 해리스 등 두 배우의 연기도 뛰어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실리와 다닐로프, 소련군 여병사 타냐(레이첼 와이즈)의 삼각 애정관계가 맞물리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부터 영웅담과 멜로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다닐로프에 대한 묘사는 너무 평면적이고, 바실리와 타냐의 사랑에 대한 묘사도 애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탓일까, 다닐로프의 유장한 대사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쟁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까지 담아내기에는 그릇이 작다.

윌리엄 크레이그가 실존인물인 바실리의 영웅담을 소재로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이 원작. 장 자크 아노 감독과 그의 오랜 파트너인 제작자 알랭 고다르가 함께 각색했다. 19일 개봉. 15세이상 관람가.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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