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대학 병원들도 환자 의뢰하는 ‘혈액암의 4차 병원’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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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메디컬 센터]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에서 소아혈액암 환자의 골수를 채취하고 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해 마취통증의학과 고현정 교수(가운데)가 시술이
 끝날 때까지 감독하고 있다. 어린이 환자의 경우 보호자를 배석시킨 상태에서 마취를 시행한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제공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에서 소아혈액암 환자의 골수를 채취하고 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해 마취통증의학과 고현정 교수(가운데)가 시술이 끝날 때까지 감독하고 있다. 어린이 환자의 경우 보호자를 배석시킨 상태에서 마취를 시행한다.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제공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쇼핑과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일은 꿈이라 여겼다. 10대 중반에 시작한 투병생활에 지칠 대로 지쳐만 갔다. 하지만 이제 구모 씨(34)는 새로운 삶을 찾은 것만 같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열여섯 살이던 2000년에 구 씨는 지역의 한 대학병원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암 선고. 곧바로 치료에 돌입했다. 항바이러스성 단백질인 인터페론을 먼저 투입했다. 글리벡, 스프라이셀, 타시그나 등 여러 표적항암제도 투여했다. 하지만 효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좋아질 만하면 다시 나빠지길 반복했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던 중 위기가 찾아왔다. 2017년 백혈병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만성에서 급성으로 바뀐 것이다. 병원을 옮겼다.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암 세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모든 치료가 실패했다.

올해 1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 씨는 서울성모병원을 찾았다.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장이 구 씨를 담당했다. 김 원장은 표적항암제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게 적합한 치료를 물색했다. 이클루시그(성분명 포나티닙)라는 약이 적합해 보였다. 김 원장은 2010년부터 이 약의 국제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그 덕분에 표적항암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게 ‘다시 시도할’ 좋은 약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약이 아직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독일에 가야만 살 수 있었다. 김 원장은 “힘들더라도 그 약을 복용해야 한다”라고 환자와 가족을 설득했고, 구 씨는 조언을 따랐다. 김 원장의 판단은 옳았다. 투약 3개월 만에 병의 진행속도가 늦어졌다. 검사를 해 봤다. 암세포가 5%로 줄었다. 침샘, 턱밑, 왼쪽 목 부분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백혈병 덩어리가 모두 사라졌다. 혈액에 들어있던 백혈병 세포도 대부분이 소실됐다. 구 씨는 그 전까지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지금은 통원 치료가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됐다. 쇼핑, 나들이 같은 일상생활도 가능해졌다.

치료에 성공한 김 원장은 평소 혈액질환을 한꺼번에 관리하고 치료하는 독립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가톨릭의료원은 올 3월 서울성모병원의 가톨릭 혈액병원을 세웠다. 김 원장은 혈액병원의 초대 수장으로서 내년 8월까지 병원을 이끈다.

○ 조혈모세포 이식 국내 최고·최대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의 근원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동집, 김춘추 교수가 국내 처음으로 형제간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수술에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성모병원(당시 강남성모병원)은 조혈모세포 이식의 중심지가 됐다.

1992년 조혈모세포이식센터가 문을 열었다. 1995년에는 형제나 가족이 아닌 비(非)혈연 타인의 조혈모세포 이식에도 처음 성공했다. 2013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조혈모세포 이식 수술 5000건을 돌파했고, 4년 후인 지난해에는 7000건을 넘어섰다. 이제는 다른 대학 병원들도 환자를 의뢰할 정도다. 그런 이유로 이 센터에 붙여진 별명은 ‘혈액암의 4차 병원’이다.

해외에서도 센터를 찾는 일이 많다. 2012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자매 환자를 대상으로 첫 해외환자 조혈모세포 이식에 성공했다. 조혈모세포 이식 해외환자는 2012년 4명에서 2015년 26명으로 늘었다. 대기 중인 해외 환자도 적지 않다. 이들의 국적은 의료 선진국인 미국부터 중국, 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이집트 등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조혈모세포는 자신의 것을 이식하는 자가 이식보다 동종 이식의 난도가 높다. 조혈모세포이식센터가 달성한 7000여 건의 수술 중 동종 이식은 74%에 이른다. 이는 국내 전체 조혈모세포 이식의 17.4%,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의 30.6%에 해당한다. 치료 성적도 국제 수준을 웃돈다. 이식 후 생존율은 혈액암 종류별로 다르지만 모든 암에서 의료 선진국인 미국보다 10∼30%포인트 높다.

신약 개발과 임상 시험 분야에서도 적잖은 성과를 내고 있다. 2001년에는 백혈병 표적항암치료제 글리벡을 가장 먼저 국내에 소개했다. 이후로도 혈액질환과 관련해 표적항암제 임상시험과 신약개발의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혈액질환 독립 진료하는 첫 병원

혈액병원은 조혈모세포이식센터의 조직을 확대하고 시스템을 독립적으로 갖춘 국내 첫 사례다. 김 원장은 혈액병원 설립 취지에 대해 “조혈모세포이식센터 때부터 누적된 기술을 체계화하고 새로운 치료 기술을 개발해야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러려면 병원급 대형 조직이 필요했다”라고 설명했다.

혈액병원은 서울성모병원, 여의도성모병원, 내년에 설립되는 은평성모병원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 통합 운영할 예정이다. 김 원장은 “환자가 거주지에 가까운 성모병원에 입원해도 서울성모병원과 같은 최고 수준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출 것”이라고 덧붙였다.

혈액내과 교수 13명, 소아청소년 혈액종양과 4명, 감염내과 전문의 2명이 혈액병원 진료를 이끈다. 진단검사의학과, 영상의학과, 치료방사선과, 호흡기내과 등과 공동으로 치료하는 다학제 체제를 갖췄다. 이 같은 대규모 다학제 시스템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다.

혈액병원은 △급성백혈병센터 △만성백혈병센터 △림프·골수종센터 △재생불량성빈혈센터 △이식·협진센터 △소아혈액종양센터 등 6개의 센터로 구성된다. 각 센터장은 해당 분야의 베스트닥터가 맡고 있다.

○ 혈액병원장부터 베스트닥터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장이 환자와 면담하고 있다. 김 원장은 백혈병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장이 환자와 면담하고 있다. 김 원장은 백혈병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다.
김 혈액병원장은 혈액내과 교수로서 백혈병, 그중에서도 만성골수성백혈병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199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혈연이 아닌 사람들끼리의 조혈모세포 이식에 성공했고, 2002년 세계 최초로 조혈모세포를 이식한 후 간까지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표적항암제의 개발과 임상시험에 가장 적극적으로 임한 의사로도 유명하다. 제1세대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을 시작으로 타시그나, 스프라이셀, 슈펙트, 보슬립, 애시미닙 등 대부분의 표적항암제 임상시험과 개발에 대표 연구자로 참여했다. 2005년부터는 스위스 제약사인 노바티스의 국제유전자분석 중앙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국제 저널에 140편 이상의 백혈병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 특히 의사들에게 최고의 저널로 평가받는 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신(NEJM)에 차세대 표적항암제 개발과 관련된 논문을, 네이처(Nature)에 백혈병 내성 관련 유전자를 규명하는 연구 논문을 각각 게재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에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이 갑자기 악화되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 ‘코블 1’을 공동연구를 통해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김 원장은 2002년부터는 백혈병 환자의 혈액과 골수세포를 보관해 연구 개발에 활용하는 한국연구재단의 한국백혈병은행도 운영하고 있다.


▼ 6개 센터로 구성된 서울성모병원 혈액병원 ▼

급성백혈병센터, 표준 치료법外 새로운 도전 활발

급성백혈병은 혈액세포에 발생한 암이다. 비정상적인 혈액세포가 과도하게 증식함으로써 면역 기능이 떨어져 감염, 장기출혈 등이 발생한다. 말 그대로 암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것이 급성백혈병이다. 백혈병 외에 백혈병 전 단계의 골수 질환으로, 30% 정도가 급성백혈병으로 악화하는 골수형성이상증후군 환자도 치료한다. 환자 생존율은 58.3∼71.8%로, 국제조혈모세포이식등록기관의 36.9∼55.8%를 크게 웃돈다.

표준 치료법인 항암화학요법과 조혈모세포 이식 외에 추가로 분자표적치료, 면역치료 등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 임상시험을 주도하는 의사는 현재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석 혈액내과 교수다. 이 교수는 급성백혈병 치료의 권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만성백혈병센터, 조혈모세포 치료 경험 국내 최다

만성백혈병(골수성, 림프구성)과 골수 안에 섬유조직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골수섬유증을 치료한다. 골수섬유증은 조혈모세포가 유일한 완치법인데, 이 센터가 국내 병원 중 가장 경험이 많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에 대해서는 암을 유발하는 ‘BCR-ABL’이라는 단백질을 선택적으로 차단하는 표적항암치료를 한다. 표적항암제로는 글리벡, 타시그나, 스프라이셀, 슈펙트 등이 사용된다. 센터는 추가로 보슬립, 이클루시그 등 새 표적항암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엄기성 혈액내과 교수는 만성림프구성백혈병 치료로 유명하다. 항암치료로 환자의 생존 기간을 늘릴 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만성백혈병에도 조혈모세포를 이식해 완치율을 높인다.

재생불량성빈혈센터, 이식 후 완치율 92∼95% 기록

재생불량성빈혈은 조혈모세포가 감소해 혈액세포가 덜 생산되면서 생기는 병이다. 감염, 빈혈, 출혈 등이 나타나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센터는 수혈, 면역조절 치료, 조혈모세포 이식 등을 환자에게 맞춤형으로 적용한다. 조혈모세포 이식 후 완치율은 92∼95%로, 세계 평균 70∼80%를 앞선다.

이식이 불가능한 환자를 위한 치료제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센터장으로 있는 이종욱 혈액내과 교수는 이 질환의 신약 임상연구를 세계 최초로 주관하고 있다. 현재 상용화 직전의 최종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센터는 적혈구가 파괴되는 희귀질환인 발작성야간혈색뇨증(PNH)과 관련해서도 이 교수 주도로 기존 치료제보다 효과가 좋은 신약의 최종 임상시험을 25개 나라에서 진행하고 있다.

림프·골수종센터, 자체 개발 면역세포치료 임상 진행

면역에 관여하는 세포 중 하나인 형질세포에 문제가 생긴 병을 형질세포이상증이라 부른다. 림프종과 골수종이 대표적이다. 이 센터는 이 두 질환을 특히 집중 치료한다. 센터장인 조석구 혈액내과 교수는 림프종 치료 분야의 명의다. 정부 과제를 여러 차례 연구했고, 줄기세포 치료, 면역세포 치료 등과 관련한 여러 특허를 가지고 있다.

센터는 매주 1회 이상 다학제 진료를 실시한다. 현재까지 2500건 이상의 진료 경험을 갖고 있다.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넘어 최근에는 분자표적 치료, 세포 치료, 면역 치료 등 최신 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새로운 치료제 개발을 위해 다국적 임상시험에 적극 참여한다. 또 자체 개발한 면역세포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제의 임상시험도 진행하고 있다.

이식·협진센터, 합병증 조기 발견위한 클리닉 운영

조혈모세포 이식 후 때로는 설사나 황달, 발진 등이 생긴다. 이 합병증을 ‘이식편대숙주질환’이라고 한다. 타인으로부터 조혈모세포를 이식받은 환자의 약 60%에서 발생한다. 합병증을 늦게 발견할수록 치료가 어렵다. 20%는 중증으로 악화되며 사망률도 10∼20%다.

이 질환은 감염관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동건 감염내과 교수가 센터장을 맡은 이유다. 이 교수는 감염관리실장으로 병원의 감염관리를 총괄하고 있다. 이 교수는 20년 동안 혈액질환과 이식 후 감염합병증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왔다.

센터는 합병증을 막기 위해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사전 검사를 시행하고 이식 후 예방접종을 실시한다. 합병증을 조기 발견하기 위한 클리닉도 운영 중이다.

소아혈액종양센터, 암세포 정밀 추적해 재발 조기 진단

소아암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소아백혈병 치료의 명의인 정낙균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다. 정 교수는 백혈병 세포에 나타나는 특정 유전자를 발굴해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치료 후 남아있을지 모르는 암 세포를 정밀하게 추적해 분석함으로써 재발을 조기에 진단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소아암은 종류가 많아 다학제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이 센터의 다학제 시스템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해 해외에서도 환자가 찾아온다.

센터는 최근 환자의 백혈병 세포를 추출해 유전자의 변이를 분석한 뒤 가장 적절한 약물을 적용하는 ‘개인 정밀의료’에 시동을 걸었다. 진단이 특히 어려운 희귀혈액질환 진단을 위해 별도의 유전자 분석 센터도 만들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혈액암#서울성모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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