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범죄수익 실어나르는 ‘지하통로’ 동결통장 1~5위 회사 모두 ‘안준호’ 이름 있어 임대료 월 1만원 비상주 사무실에 주소 올리고 ‘위장 쇼윈도’ 가짜 쇼핑몰 만들어 수사망 피해 도박-위조 전과자 모아 ‘대포통장 공장’ 가동 30대 주축 조직 흔치 않아… 실제 ‘몸통’ 있을듯
금융감독원의 보이스피싱 통장 데이터에 올라간 안준호(가명) 일당의 8개 회사 등기부등본. 이들이 만든 회사 명의의 통장은 최소 60개로, 단일 조직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추정된다.
대포통장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유통시키는 유령 회사라면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 그 단서는 뜻밖에도 정부의 공개 데이터 안에 있었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는 보이스피싱에 쓰인 것으로 지목돼 소명 절차까지 거친 뒤 동결된 통장 목록(채권소멸 사실공고)이 매주 공개된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12만6866개가 등재됐다. 이조차 실제 범죄에 사용되는 전체 대포통장의 규모와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일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올 1월 1일부터 지난달 14일까지 금감원 목록에 새로 올라온 통장 1만6854개의 명의를 추가로 전수 분석했다. 최소 189명의 피해금을 착취한 대한퍼스트처럼, 최근 암시장에서 활동하는 다른 대포통장 조직을 역추적하기 위해서였다. 그중 송금 한도가 커서 범죄 조직이 선호하는 회사 통장은 2053개였다. 가장 많이 적발된 회사를 줄 세웠다. 1위부터 5위까지 회사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아 나란히 펼쳤다. 회사 이름도, 주소도 달랐다. 그런데 대표나 이사 자리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이름이 있었다.
31세 안준호(가명)였다.
● 월 1만 원에 차린 대포통장 공장
추적 반경을 넓혀 보니 안준호와 연결된 회사는 8개로 늘었다. 그는 대표 3곳, 이사와 감사 등 모두 11개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들의 흔적을 따라가 보니 일종의 매뉴얼처럼 정형화된 행동 수칙이 보였다.
제1원칙: 회사 주소는 비상주 사무실로 해결한다. 사업자등록을 하려면 주소가 필요하다. 안준호 일당은 월 1만 원 안팎에 주소를 빌려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지난달 7일 찾아간 전남 나주시의 한 비상주 사무실. 좁은 복도에 놓인 우편함 하나를 63개 업체가 공유하고 있었다. 안준호 일당의 회사는 그중 29번째 칸에 이름만 걸어두고 있었다. 사무실 관리자는 “계약은 주로 전화로 한다. 500개 업체를 관리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일부 비상주 사무실은 아예 “은행 실사가 나오면 알아서 대응해 준다”고 광고했다.
제2원칙: 은행 통과 프리패스, ‘통신판매업’을 노린다. 회사를 세운 뒤 통장을 만들려면 은행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안준호 일당은 주 업종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내세웠다. 온라인 거래 특성상 초기엔 실물 사무실이나 재고가 없어도 통장을 파기 쉬운 업종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범죄 수익을 현금화하기 쉬운 상품권 판매업을 추가한 경우도 있었다.
제3원칙: 은행 실사를 피할 ‘위장 쇼윈도’를 꾸민다. 서류만으로는 최근 들어 깐깐해진 은행의 눈을 속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안준호 일당은 아예 가짜 가구 쇼핑몰을 인터넷에 띄웠다. 홈페이지에는 ‘모던 소파 89만 원’, ‘원목 다이닝 테이블 45만 원’ 등 그럴싸한 사진과 가격표가 붙었다. 회원 가입 버튼은 작동하지 않았다. 은행이나 수사당국의 눈을 피하기 위한 전시용이었다.
안준호 일당이 만든 온라인 쇼핑몰의 실제 모습. ‘모던 소파’를 89만 원에, ‘원목 다이닝 테이블’을 45만 원에 판다고 적었지만, 회원가입도 되지 않는 가짜 사이트다.이렇게 찍어낸 대포통장은 추적이 어려운 텔레그램을 타고 각종 범죄 조직으로 팔려 나갔다. 이들 회사의 통장이 올해 보이스피싱에 동원돼 적발된 횟수는 60건에 달했다.
● 등기부등본에 올라온 전과자들
안준호의 등기상 주소인 광주 북구 두암동의 한 다세대주택 문을 두드렸다. 60대 여성 집주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왔다. “그런 사람을 왜 우리 집에 와서 찾아요. 남편하고 나하고 둘이 살아요. 월세방도 비어 있어요.”
인터넷에서도 안준호는 지워져 있었다. 그가 쓰던 연락처로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을 뒤졌지만 얼굴 사진이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흔적은 2018년 서울에서 중고 게임을, 2022년 제주에서 노트북을 판 기록 두 건이 전부였다. 별다른 범죄 전력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등기부등본에 함께 이름을 올린 공범들은 달랐다. 조민기(가명·30)가 대표를 맡은 회사 통장은 또 다른 온라인 도박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데 동원됐다. 한 남성이 회삿돈 4억5000만 원을 횡령해 90차례 판돈을 입금하다가 적발됐는데, 그 판결문에 조민기의 회사 통장이 등장한 것. 조민기도 2020년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다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었다. 도박장 전과자가 만든 회사 통장이 도박 자금 세탁에 쓰인 것이다.
안준호 일당이 만든 회사의 통장은 도박 사이트에도 쓰였다. 판결문에 표시된 ‘주식회사 J’가 안준호 일당 명의의 회사 중 한 곳이다.안준호 일당의 회사 두 곳에 이사로 이름을 올린 60대 중반 남성 박동현(가명)은 법무사 사무소 사무장 출신이었다. 그는 2002년 허위 공증과 공정증서 위조 혐의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 그는 안준호 일당의 유령 회사 3개가 잇달아 설립될 무렵 한 법무사 사무소에 취업했다. 회사를 법원에 등기하려면 본인이 직접 하거나 법무사나 변호사가 신청서를 대리 제출해야 한다.
● “30대 초반 혼자 짠 판이 아니다”
경찰은 히어로콘텐츠팀의 데이터 분석 결과를 넘겨받아 안준호 일당을 ‘전문 대포통장 유통 조직’으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기존에 전국 각지에서 개별 보이스피싱 사건으로 흩어져 수사되던 사건들이 데이터를 통해 하나의 조직으로 묶였다. 결정적 단서는 통장을 개설한 장소였다. 광주 일대를 근거지로 한 일당이 연고도 없는 경남 진주시의 특정 신협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회사 통장을 개설한 사실이 확인됐다.
경찰은 안준호가 ‘바지사장’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전과 없는 30대 초반을 주축으로 한 조직이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가동된 대포통장 공장을 굴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란 판단이다. 정교한 흐름의 배후엔 자금을 대고 판을 짠 실질적인 몸통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금감원 데이터에서 안준호 일당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포착된 건 지난달 중순이다. 대포통장 조직이 왜 하필 제2금융권을 노리는지, 그 이유는 2회에서 이어진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부터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히든: 검은돈의 혈관, 대포통장’은 각종 범죄의 핵심 도구인 대포통장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 ▽취재: 임재혁 손준영 조승연 기자 ▽사진: 박형기 기자 ▽편집: 하승희 봉주연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인터랙티브 기획: 김재희 기자 ▽인터랙티브 개발: 임희래 ND ▽인터랙티브 디자인 및 영상: 정시은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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