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선 떠오르다]中·日 무역하던 아버지 잃은 86세 유족 “곤론마루, 가족 삶 바꿔”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2일 10시 54분


〈3〉 유족의 삶

일본과 조선을 오가던 연락선인 곤론마루에 탑승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김종주 씨의 딸 김영자 씨(86)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받은 각하결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
일본과 조선을 오가던 연락선인 곤론마루에 탑승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김종주 씨의 딸 김영자 씨(86)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받은 각하결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김화영 기자 run@donga.com


“아버지의 흔적을 꼭 찾고 싶습니다.”

1일 오전 경남 양산시 동면의 한 아파트 거실. 갈색 종이봉투에 담긴 여러 뭉치의 서류 중 한 장을 꺼내 보이며 김영자 씨(86)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쥔 것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2022년 6월 보낸 결정통지서였다. 문서에는 “‘김종주의 곤론마루(崑崙丸) 격침 사건’이 진실규명 조사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라는 내용이 적혔다.

● 유족 “지자체, 정부 모두 외면해”

김 씨는 ‘아버지인 김종주가 부관연락선인 곤론마루에서 숨졌다’라는 취지의 문구가 적힌 호적 자료와 아버지 사진 등을 정부에 제출했다. “양산시장과 부산시장, 대통령(청와대)에 사건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청했으나 ‘조사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조선인 등 582명이 숨진 해난 사건은 분명 일어났는데, 왜 세상에 없었던 일처럼 여기는 것일까요.” 김 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곤론마루 격침 사건은 일제 강점기 전시 상황에 발생한 사건으로 국가 폭력이나 항일운동에 따른 피해 사례에 해당하지 않아 진실화해위나 정부의 조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김 씨는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외삼촌에게 듣고 이를 근거로 다시 조사를 요청했더니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다”며 “내가 그런 문서를 가지고 있을 리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각하 결정이 내려진 구체적인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접촉한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진실화해위 2기 활동이 끝나고 3기가 출범했다. 2기 신청 사건은 현재 문서보관소 등에 보관돼 있어 즉각적인 확인이 어렵다”고 밝혔다.

곤론마루에 탑승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김종주 씨의 증명사진. 김화영 기자 run@donga.com
곤론마루에 탑승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김종주 씨의 증명사진. 김화영 기자 run@donga.com
김 씨는 현재 국내에서 확인된 유일한 곤론마루 격침 사건의 유족이다. 아버지 김종주 씨는 경남 통영 출신 한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명문이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로 일하다가 사업가로 전향했다. 중국 청도와 일본, 부산, 경성(서울) 등을 오가며 의약품 무역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3년 10월 5일 새벽 일본 시모노세키를 출항해 부산으로 향하던 곤론마루에 탑승한 뒤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김 씨는 네 살이었다.

어머니는 사고 직후 어린 딸을 업고 배가 침몰한 해역과 가장 가까운 섬으로 향했다. 김 씨는 “섬 언덕에 시신을 줄지어 놓고 멍석 같은 것으로 덮어놨다고 들었다”며 “어머니가 하나하나 들춰 확인했으나 아버지는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년 10월 5일이면 작은 상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

● 부유했던 가족 삶 송두리째 바꾼 침몰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은 뒤 가족의 삶은 급격히 무너졌다. 일본의 은행에 예치됐던 아버지의 자산은 해방 후 동결돼 한 푼도 찾지 못했다. 김 씨는 “돈이 너무 많아서 통장 세 개에 분산해 관리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생전에 ‘그 돈만 있어도 가족이 평생 사는데 문제없었을 텐데’라는 푸념을 자주 했다”고 회상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했던 김종주 씨(윗줄 가운데)가 가족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영자 씨 제공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했던 김종주 씨(윗줄 가운데)가 가족들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김영자 씨 제공
김 씨의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함께 부산 동래구에서 미나리 농사를 짓고 중구 자갈치시장에서 양말 등의 잡화를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에 매진했던 김 씨는 부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약학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네가 수년 동안 대학에 다니면 우리는 평생 집 한 채도 마련할 수 없다”고 어머니가 만류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이후 극장 매표소 등에서 근무하며 일찍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결혼 이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고, 현재 김 씨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주거급여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김 씨는 “아버지가 곤론마루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우리 가족의 삶은 지금과 전혀 달랐을 겁니다”라고 했다. 김 씨에게 곤론마루 격침 사건은 삶 전체를 바꾼 분기점이었다.

김 씨가 국가에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았다. 분명히 일어난 일을 외면하지만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어떤 사람들이 탑승했다가 희생됐는지 정도는 조사해 밝혀지면 좋겠습니다. 10월 5일을 공식 추모일로 지정하고 최소한의 예우라도 해주길 바랍니다.”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트렌드뉴스

트렌드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