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자에게 감정은 느끼는 게 아닌 견디는 것[허명현의 클래식이 뭐라고]

  • 동아일보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무대 위 연주자를 바라보면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지금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구나, 감정이 북받쳐 올라 음악을 쏟아내고 있구나. 하지만 뛰어난 연주자들의 실제 상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꽤 다르다. 그들은 감정에 빠져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붙잡고 버티는 쪽에 가깝다. 연주에서 감정은 흘러넘쳐야 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음악은 감정의 예술이지만, 연주는 감정의 방출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가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순간 음악은 쉽게 무너진다. 템포는 흔들리고, 호흡은 불안정해지며, 곡 전체의 균형도 흐트러진다. 특히 피아니스트처럼 혼자서 긴 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연주자들이 감정에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손은 무거워지고, 판단은 느려진다. 그래서 뛰어난 연주자일수록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유지한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개념이 하나 있다. 바로 ‘자유롭게 연주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자유로운 연주를 감정이 이끄는 대로, 순간의 느낌에 맡겨 연주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마음이 벅차오르면 느리게, 흥이 나면 빠르게 연주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에서 말하는 자유는 그런 즉흥적 방출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정해진 틀과 흐름을 정확히 지키면서, 그 안에서 미세한 흔들림을 허용하는 상태를 자유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가장 자주 언급되는 예가 바로 쇼팽의 음악에서 등장하는 ‘루바토’다. 루바토는 이탈리아어로 ‘훔치다’란 뜻에서 나온 말로, 박자를 조금 늦추거나 앞당기며 유연하게 연주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은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흐름과 균형은 단단히 유지한 채, 아주 미세하게 음악을 흔드는 기술에 가깝다. 감정이 끓어오른다고 해서 템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견딘 상태에서 아주 조금만 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루바토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감정의 절제에서 나온다. 아주 절묘한 기술이다. 이 루바토를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대가로 꼽힌다.

이렇게 감정이 절제된 연주는 향수와도 비슷하다. 향을 한 번에 많이 뿌리면 처음에는 강렬하지만 금세 머리가 아프고, 결국 향이 가진 섬세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좋은 향수는 멀리서 천천히 다가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에 남고,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연주자가 감정을 견딘다는 것은 음악을 한 번에 쏟아내는 대신 오래 머물게 만드는 선택인 것이다.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연주의 주인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연주자는 감정을 다루는 사람에 가깝다. 감정이 너무 앞서면 눌러 두고, 흐려지면 다시 불러오는 것. 이 조절의 반복 속에서 음악은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래서 뛰어난 연주자들의 연주는 격정적으로 분출되기보다는 단단하게 버틴다. 음악이 슬픔을 품고 있어도 흐름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감정이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러도 구조는 끝까지 유지된다. 연주자는 감정을 순간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음악의 끝까지 함께 끌고 간다. 울음을 터뜨리듯 표현하기보다는, 울음을 삼킨 채 끝까지 말을 이어가는 쪽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감정을 견딘 연주일수록 듣는 사람은 더 큰 감정을 느낀다. 연주자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이 울 수 있다. 연주자가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음악은 무너지지 않고 우리에게 도달한다. 그래서 무대 위 절제는 차가움이 아니라 관객을 위한 배려에 가깝다. 자신의 감정보다 음악을 우선순위에 두는 태도, 그것이 연주를 비로소 예술로 만든다.

결국 연주란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감정의 지속이다. 순간적으로 터뜨리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의 시간 안에서 감정을 지켜내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은 감정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을 품고, 견디고, 관객들을 끝까지 데려간다. 우리가 위대한 연주 앞에서 오래 여운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감정이 쉽게 흘러가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연주자들에게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음악감정#연주자심리#감정견디기#클래식연주#음악균형#감정조절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