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에 도전해 왔던 한국 경제의 역사 속에서 조선업만 한 ‘맨땅의 헤딩’도 없었다. 1970년대 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을 들고 투자자들과 선주들을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1974년 맨몸으로 만들어낸 유조선 1척이 51년 만에 5000척이 됐다. 조선 역사가 긴 유럽과 일본의 어떤 회사도, 2000년대 이후 물량 공세에 나선 중국의 국영회사들도 해내지 못한 세계 최초의 금자탑이다.
▷HD현대는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을 열었다. 딱 5000번째로 넘긴 선박은 필리핀 초계함 ‘디에고 실랑’이었다. 그동안 HD현대가 건조한 선박은 총 68개국 700여 개 선주사에 납품됐다. 선박들의 길이를 평균 250m로 잡고 5000척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총 길이가 125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일본 도쿄까지의 직선거리(약 1150km)보다 길다. 수직으로 세우면 8848m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41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전설의 시작은 1971년 정 회장이 그리스에서 수주한 26만 t급 초대형 유조선이었다.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짓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하지만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 준공과 함께 유조선을 성공적으로 물에 띄웠다. 건조 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사양을 변경할 정도로 까다로웠던 그리스 선주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고 칭찬했다. 가칭 ‘7301호선’이던 배에 고 육영수 여사가 ‘애틀랜틱 배런(대서양의 남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항해에 성공한 HD현대는 이후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내려 갔다. 1980년 최초의 국산 전투함 ‘울산함’을 건조하며 K-방산의 시작을 알렸고, 1983년 선박 건조량 기준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후 글로벌 조선 수요가 컨테이너선, 액화천연가스(LNG) 수송선, 친환경 선박 등으로 변화할 때마다 HD현대는 시장을 선도하며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선박 등 미래 해양 혁신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HD현대의 첫 배가 인도된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조선입국(造船立國)’ 휘호는 현실이 됐다. 수출 한국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왔을 뿐 아니라 최근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50여 년 전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 그림은 금빛 거북선 모형으로 바뀌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과거 50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50년도 ‘K-조선’이 한국 경제 앞에 놓인 거친 파도를 헤치고 힘찬 항해를 이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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