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민 정원사진가가 지난해 국립수목원 육림호에 내린 첫눈 풍경을 찍은 사진. 지난해 12월 영국 PGPA(Professional Garden Photographer Association·전문정원사진가협회)의 ‘이달의 사진’에 선정돼 한 달 내내 협회 홈페이지 첫 화면에 노출됐다. 우승민 제공
첫눈은 늘 설렘이다. 지난해 첫눈은 예상치 못한 폭설로 놀라움까지 더했다. 다들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첫눈의 추억을 남기던 이날, 집에서 차로 15분 떨어진 경기 포천의 국립수목원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선 남자가 있었다. 우승민 정원사진가(38)다. “집(경기 양주) 가까이에 아름다운 국립수목원이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에요.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과 국립수목원에 가서 놀기 때문에, 첫눈 내리던 날도 거의 반사적으로 향했죠.”
그는 흰 눈을 포근하게 입은 나무들이 국립수목원 육림호에 거울처럼 비친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순백의 풍경 사진을 보고 있으면 정신이 깨어나고 마음이 깨끗해진다. 해외에서도 그렇게 보였을까. 이 사진은 지난해 12월 영국 PGPA(Professional Garden Photographer Association·전문정원사진가협회)의 ‘이달의 사진’ 세 편 중 한 편으로 선정돼 한 달 내내 협회 홈페이지 첫 화면에 노출됐다. 이뿐이던가. 지난해 8월에는 울산 태화강국가정원, 10월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 11월 경기 가평 더스테이힐링파크 등 그가 찍은 사진들이 PGPA ‘이달의 사진’으로 한 해에 무려 네 차례 선정됐다. 정원에 관심 있는 세계인들이 그렇게 K-가든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접했다.
우승민 정원사진가 우 사진가는 2020년 한국인 최초로 PGPA 정회원이 됐다. 앞서 아시아 정원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원예협회 국제사진 공모전(RHS Photographic Competiton)에서 상을 받자 평소 알고 지내던 PGPA 정회원 중 한 명이 추천서를 써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 사진가는 2020년 경북 봉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거울 연못을 찍은 ‘몽환의 아침’으로 RHS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데 이어 2021년 경기 양평 두메향기, 2022년 국립세종수목원 희귀특산식물전시온실을 찍은 사진으로 연거푸 RHS 정원 사진 부문 상을 받았다. 3년 연속 수상은 세계 최초였다.
우승민 사진가가 2020년 RHS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수상한 ‘몽환의 아침’.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거울연못을 찍은 사진이다. 우승민 제공 국내 식물원 수목원 업계에서 ‘우승민’이라는 이름은 ‘프로’로 통한다. 그의 정원 사진에는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2019년 10월 30일 오전 7시쯤 촬영한 ‘몽환의 아침’ 사진은 물안개 핀 거울 연못에 비친 태양과 아침 이슬을 머금은 정원 식물이 그야말로 꿈결처럼 어우러진다. 2022년 그의 RHS 수상작인 국립세종수목원 희귀특산식물전시온실 사진은 보고 또 봐도 마음에 여운이 남는다. 햇살이 온실에 비쳐들어 홍가시나무와 새우난초를 비추던 황홀한 순간을 우 사진가는 기다리고 포착했을 것이다. 업계에서는 “우승민 사진가가 찍으면 어느 정원이든 다 예쁘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는 어떻게 정원사진가가 되었나.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2022년 우승민 사진가가 RHS 공모전에서 수상한 국립세종수목원 희귀특산식물전시온실 사진. 그는 2020~2022년 3년 연속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우승민 제공 ―사진을 전공했나. “가천대(옛 경원대)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림을 그려서인지 대학 수업에서 지방 답사를 다닐 때 아름다운 풍광에 끌렸다. 그림 대신 사진을 찍으면서 취미가 됐다. 크고 작은 사진 공모전에 도전해 150여 차례 상을 받았고 2014년 제1회 아름다운 조경·정원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당시 대상을 받은 사진은. “벚꽃 핀 봄날 경기 양평 두물머리에서 한 부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찍은 ‘봄을 타다’라는 제목의 사진이었다. 아내와 연애할 때 걷던 길을 함께 산책하다가 찍었다. 당시 처음으로 야외에서 열린 조경문화박람회에서 수상하고 사진전까지 열려 조경과 사진을 둘 다 잡은 것 같아 뿌듯했다.”
우승민 사진가가 2014년 제1회 아름다운 조경·정원 사진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봄을 타다’ 사진. 우승민 제공 ―대학 졸업 후 바로 정원사진가가 된 건가. “아니다. 처음에는 조경 설계사무소에서 일했다. 그런데 매일 사무실에서 밤샘 작업하며 도면에 매달리는 삶에 지쳐갔다. 조경이 자연을 오히려 훼손하는 게 아닌지 회의감마저 들었다. 1년 만에 퇴사해 국내 소셜커머스 회사에 입사해 맛집과 제품을 촬영하는 일을 하며 고객이 끌릴만한 사진을 고민하게 됐다. 이후 한 테마파크 기획홍보부에 들어가 자연을 렌즈에 담으면서 꽃이 시들어도 열매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프리랜서 아닌가. “맞다. 사정이 생겨 테마파크 일을 관둔 뒤 평소 즐겨 찾던 강원 춘천 제이드가든에 정원 사진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먼저 했다. 당시 홍보 사진이 필요하던 제이드 가든 측의 니즈와 부합해 2018년 연간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정원 사진을 찍게 됐다. 제이드가든은 주로 유럽풍 건물 위주로 소개돼왔는데 막상 가보니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원초적인 자연의 공간이 신비로웠다. 계절의 변화를 담기에 훌륭한 장소였다.”
강원 춘천 제이드가든의 겨울 풍경. 우승민 제공 ―정원사진가와 계약하다니 제이드가든이 선구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당시 좀 더 큰 스케일의 조경 사진가는 활동하고 있었지만, 정원 사진도, 정원사진가도 개념이 희박하던 때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진이 홍보되면서 다른 국내 정원들도 촬영하게 됐다.”
당시 제이드가든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이렇게 전한다. “우승민 사진가보다 사진을 더 잘 찍는 사람은 많을 수 있다. 그런데 우 사진가는 본인이 조경을 전공해서인지 정원을 만든 사람이 고생한 부분, 부각하고 싶은 부분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그것을 렌즈에 담는다. 그게 그의 차별화된 경쟁력이다.”
지난해 10월 PGPA ‘이달의 사진’으로 선정된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 사진. 우승민 제공 ―2020년 첫 RHS 공모전 수상작인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사진은 어떻게 찍게 됐나. “백두대간은 워낙 산세와 기운이 좋아 그 자체가 훌륭한 정원이라고 생각한다. 운이 좋았다. 백두대간수목원에 상주하는 분들도 보기 어렵다는 연못의 물안개를 만나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자연이 준 선물이었다.”
―최근 SNS에 올린 담양 소쇄원의 설경이 아름다웠다. “한국의 원림에 가면 자연을 즐길 줄 알던 선조들의 지혜가 저절로 느껴진다. 담양 소쇄원과 인근 명옥헌 원림은 어느 계절이나 아름다운데 마침 방문한 날 눈이 내렸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였던 안동 만휴정도 가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승민 사진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about_gardens)에 올린 전남 담양 소쇄원의 설경. ―우리 국민에게 정원 여행지로 소개하고 싶은 장소가 많을 것 같다. “전남 담양의 죽녹원과 여러 별서들, 광주호 호수생태원, 서울숲의 오소정원, 국립수목원의 ‘식물 진화 속을 걷는 정원’, 국립세종수목원의 사계절전시온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의 암석원과 만병초원, 화담숲의 자작나무숲, 천리포수목원 겨울정원, 가평 더스테이힐링파크의 와일드가든, 서울식물원 온실을 특히 추천하고 싶다.”
지난해 8월 PGPA ‘이달의 사진’으로 선정된 울산 태화강국가정원 사진. 우승민 제공 ―앞으로의 포부는. “정원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식재 위주로 정원을 즐기는 것 같아 그동안 그런 사진을 출품해 상을 받았다. 꾸준히 마음 비뚤어지지 않고 정원 사진을 쭉 찍어 한국의 전통 정원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하겠다.”
꾸준히, 마음 비뚤어지지 않고, 쭉~. 설날을 코앞에 두고 영혼이 맑아지는 삶의 태도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그가 찍은 사진들을 가만히 본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식물, 해질녘 부드러워진 햇살…. 정원에 자주 가야 만날 수 있는, 마음의 렌즈가 깨끗해야 감사하게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정원 사진에서 길을 찾고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한 남자를 떠올리며 이 겨울의 정원들을 찾아나서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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