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충신’의 집안에서 나온 탈북 화가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1일 13시 49분


코멘트
탈북화가 강춘혁이 2018년 자신의 대표 그림 ‘정체성의 혼돈’ 앞에 서 있는 모습.
탈북화가 강춘혁이 2018년 자신의 대표 그림 ‘정체성의 혼돈’ 앞에 서 있는 모습.

북한 함경북도 온성탄광에는 전국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온탄 6부자’가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 다섯 명이 당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탄광으로 자원해 열심히 일한다고 북한 매체가 붙여준 이름이다. 북한 선전 매체에 수시로 소개됐고, 집에는 훈장이 넘쳐났고, 명절 때마다 노동당 간부가 찾아와 김일성의 선물이라며 술과 과일 따위를 건네주었다.

하지만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던 1990년대 중반 엄혹한 ‘고난의 행군’ 시절, 온탄 6부자가 충성을 다 했던 지도자는 식량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1996년 굶어 사망하고, 첫째와 셋째 아들 역시 먹지 못해 죽었다. 특히 셋째 가족은 큰딸 하나를 남겨두고, 아내와 작은 딸마저 죽었다. 넷째 아들은 탈북했다.

사실 이 집안에서 탄광에서 일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첫째 자식은 딸이었고, 그 역시 탄광에서 일했는데 북한 당국은 작명이 부담스러웠는지 딸은 빼고 ‘6부자’만 내세웠다. 딸 역시 탄광에서 일하다가 탄차 와이어가 끊어져 수십 명이 죽은 대형사고 때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됐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돈을 벌려 중국으로 넘어갔던 넷째 아들은 제 발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국을 반역했다는 이유로 강제 ‘노동단련대’에 끌려갔다가 모진 고초를 당한 뒤 가까스로 석방됐다. 그는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껴 온 가족과 동네 사람까지 11명이나 데리고 탈북했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강을 건넜던 12살짜리 아들은 16년 뒤 한국의 음악방송 ‘Mnet’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Show Me The Money)3’에 출연해 신랄한 가사로 북한 지도부를 비판했다.

“거기 있는 리설주가 조국의 어머니. But she is not my 어머니. 내 어머니가 아오지에서 얻은 건 결핵. 땅굴 판 돈 착취해서 만든 것은 핵. 배때지에 살이나 빼. 난 두렵지 않아 공개처형. 그래서 여기 나왔다 공개오디션.”

그때 그는 탈북래퍼 강춘혁으로 소개됐다. 하지만 그의 실제 직업은 홍익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였다.

모든 탈북민이 각자의 기막힌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듯이, 북한의 최북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화가로 살기까지 강 씨의 인생 역시 순탄치는 않았다.

2020년 1월 8일 김정은 생일에 열린 한 전시회에서 강 씨가 김정은을 풍자한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2020년 1월 8일 김정은 생일에 열린 한 전시회에서 강 씨가 김정은을 풍자한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 엔화로 살았던 ‘온탄 6부자’
1986년 강춘혁이 온성에서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마을에서 제일 잘 살았다. 그땐 누구도 몰랐다. 10년 뒤 어떤 비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줄을….

춘혁의 아버지는 온탄 6부자 중 넷째였다. 탄광 선전대에 속한 아버지는 트럼펫을 불었다. 아침 일찍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 일하러 나오는 사람들을 위해 선전 가요를 연주했다. 그렇다고 악기만 연주한 것은 아니다. 연주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탄광에 들어가 석탄을 캤다. 춘혁의 어머니 역시 아버지처럼 선전대에 속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정식 근무시간엔 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하지만 강 씨 집안이 잘 산 것은 열심히 일한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춘혁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던 사람이었다. 할머니 역시 한국 태생이지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거기서 둘이 만났다.

차별 받는 일본 땅에서 살며 늘 조국이 그리워 돌아오려 했지만, 해방이 돼도 오는 길은 막혀 있었다. 그러다가 북한이 먼저 재일동포 귀국사업을 벌였다. 춘혁의 할아버지는 1960년 자식들을 데리고 주저 없이 북한으로 가는 ‘만경봉호’에 올랐다. 그때 춘혁의 부친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북한으로 돌아온 이들은 평양에 살 수도 있었지만, 먼저 귀국한 작은 할아버지가 온성에 살게 되면서 그들도 온성을 거주지로 선택했다.

북한 생활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배급해 의존해 먹고 사는데 급급했을 뿐, 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일본에 남았던 형제들이 훨씬 더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에 살던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쪽 친척들은 1970년대부터 북한에 형님을 보러오면서 수시로 엔화를 들고 왔다.

그 덕분에 춘혁의 집은 1990년대 초반까지는 탄광 마을에서 최고의 부자집이 됐다. 큰 기와집에서 살면서 탄광마을에선 매우 드문 천연색 TV는 물론 각종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살았다. 작은 할아버지는 1980년대 평양에 와서 도로도 깔아주었다.

평양역 앞에서 김일성광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북한에서도 전설처럼 내려오는 구간이다. 대충 삽으로 땅을 파고 돌을 넣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던 북한은 그때 일본 기술자들이 와서 도로를 까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고 지금도 그때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갈도 딱 정해진 규격이 아니면 안 쓰고, 그 자갈을 물로 씻어 깔고, 자로 두께를 재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공했다. 그래서인지 북한의 다른 도로들은 건설되고 몇 년만 지나면 움푹움푹 패이지만, 평양역-김일성광장 구간은 지금도 끄떡없이 유지된다.

그런데 1992년 11월 북한과 일본의 수교 교섭이 중단되고, 일본이 납치 일본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강 씨네 집을 찾던 친척들도 더는 오지 못하게 됐다. 돈도 들어오지 못했다. 늘 일본에서 돈이 올 줄 알고 저축하지 않고 살던 춘혁의 집은 형편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찾아온 고난의 행군으로 탄광도 문을 닫게 됐다.

2014년 인사동에서 열린 ‘꽃제비 날다’라는 제목의 북한인권전시회에서 강 씨가 라이브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2014년 인사동에서 열린 ‘꽃제비 날다’라는 제목의 북한인권전시회에서 강 씨가 라이브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 11명이 함께 떠난 탈북길
1994년의 고난의 행군을 사람들은 배급이 중단돼 굶어죽던 시절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 쌀만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전기도 끊겨 늘 정전 상태에서 살았고, 땔감도 없어 떨면서 살았다.

배고프니 탄광에 일하려 못나가고, 탄광이 가동 중단되니 석탄이 없고, 석탄이 없으니 화력발전소가 돌아가지 못하고, 발전소가 멎으니 비료 생산도 못하는 식의 악순환이 이어지게 됐다. 탄광에 전기가 오지 않아 1년쯤 방치하니, 온성탄광의 모든 갱도들이 물에 잠겼다. 탄광이나 광산은 양수기로 수시로 지하수를 퍼내야 하는데, 전기가 없어 양수기를 가동할 수 없으니 탄광 자체가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침수된 갱은 설사 물을 퍼내도 동발이 다 썩기 때문에 다시 사용하기 불가능해지게 된다. 온성탄광은 1996년에 공식적으로 운영 중단을 선포했다.

탄광에 일하러 가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산에 올랐다. 나무를 베어 소토지(개인 경작밭)를 일구었다. 하지만 산의 경작지도 한정돼 있었다. 산을 개간하지 못한 사람들은 배운 것이 석탄 캐는 것밖에 없는지라 각자 수직갱을 파서 석탄을 캐서 팔았다.

곡괭이와 삽으로 탄맥이 나올 때까지 지상에서 수십m 깊이의 수직굴을 파고 들어간 뒤 석탄을 양동이로 퍼올렸다. 그렇게 원시적으로 캔 석탄을 시장에 팔아 옥수수와 바꾸었다. 탄광 가동이 중단된 뒤 온성탄광 일대에는 이런 수직갱도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1997년 봄이 되자 땅이 녹으면서 곳곳에서 개인 갱도들이 무너졌다. 또 숱한 사람들이 석탄 캐려 들어갔다가 무너진 흙더미에 깔려 죽었다.

석탄 채굴도 할 형편이 못 되자 춘혁의 아버지는 밀수에 손을 댔다. 도 소재지인 청진에 나가 마른 생선이나 해삼, 개구리기름 등을 닥치는 대로 들여와 중국에 몰래 팔았다. 하지만 그걸로 대가족이 먹고 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춘혁의 부친은 직접 돈을 벌어오겠다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마을에는 황해도 쪽에 장사하러 떠났다고 소문을 냈다. 춘혁이 살던 온성탄광노동자구(온탄구)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중국 도문이다. 중국에 건너간 부친은 어느 국수공장에 취직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춘혁의 집에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노동단련대에 잡혀있다는 것이다.

뜻밖의 소리에 달려가 보니 중국에 있을 줄 알았던 부친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허약환자가 돼있었다. 알고 보니 도문에서 강 건너 마을을 건너다보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던 부친은 어느 날 술김에 집에 간다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왔다. 그런데 강을 건너와서 경비대에 체포됐고, 노동단련대로 끌려갔다. 춘혁의 집은 없는 돈을 빡빡 끌어 모아 뇌물을 줘서 부친을 병보석으로 꺼내왔다.

집에 와서 몸을 추스르던 부친은 어느 날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며 온 가족과 함께 탈북 길에 올랐다. 12살 밖에 안 된 춘혁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1998년 3월 9일 중국으로 탈북하던 날을 춘혁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모았는지 춘혁의 가족 세 명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11명이 새벽 일찍 길을 떠났다. 가끔 마주친 마을 사람들이 “춘혁이 아버지 어딜 가오”라고 물으면 “저기 아래 남양 장마당에 갖고 올 것이 있어 가오”라고 대답하며 태연하게 걸어갔다.

그렇게 두만강 옆의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경비대가 아침밥을 먹느라 근무초소를 비운 새벽 6시쯤 일행은 한꺼번에 두만강으로 뛰어들었다. 아직도 강엔 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수영도 제대로 못하는 춘혁은 아버지 덕분에 빠져죽지 않고 강을 넘을 수 있었다.

중국 땅에 도착해 도로에 올라섰는데 이번엔 10분도 안 돼 공안차가 나타났다.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산으로 뛰어올랐다. 차를 타고 온 두 명의 공안원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산 아래서 고함을 지르다 다시 사라졌다.

산 위에서 11명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면 잡힐 게 뻔했다. 춘혁은 그때 헤어진 마을 사람 중 아직 한국에 온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춘혁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얼마 전까지 다니던 도문의 국수공장으로 다시 찾아갔다. 거기서 얼마쯤 머물렀지만, 국경 바로 옆 도문은 검문검색이 삼엄해 세 명이 오래 머물 곳은 못됐다.

이때 이들에게 조선족 브로커가 접근했다. 흑룡강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한시라도 도문을 뜨고 싶었던 이들은 흑룡강의 어느 깊은 산골에 인력으로 팔려갔다.

식구가 처음 간 곳은 버섯을 재배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은 ‘뱀산’이라고 불렸다. 습도가 높아 주변 산에 올라가면 온통 뱀 천지였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면 마당 곳곳에 뱀들이 기어 다녔다. 그곳 개들은 뱀을 잡아먹고 살았는데, 가끔 독사라도 만나면 개 얼굴이 팅팅 부었다. 돼지는 독사도 상관없이 잘 씹어 먹었다.

춘혁은 자신도 놀지만 말고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 산에 올라가 뱀을 잡아 돼지 키우는 마을 한족 노인들에게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뱀을 수십 마리 잡아 마대에 메고 한족 노인의 집에 찾아가 돼지우리에 쏟아줬다. 그런 12살 아이를 노인들은 점점 예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중국어도 가르쳐 주었다.

뱀산에는 오래 살진 않았다. 1999년 춘혁의 부친은 흑룡강 한 도시의 양꼬치 식당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월급은 절반 받는 대신 춘혁을 학교에 보내주는 조건이었다. 그곳에 좀 정착할까 싶었는데 어느 날 이들의 신분을 알아본 사람들이 가족을 딴 곳에 팔아먹을 꿍꿍이를 하는 것을 알고 다시 야반도주했다. 이들이 간 곳은 먼저 탈북한 춘혁의 외사촌(고모 아들)이 정착한 연변 왕청의 한 목재공장이었다.

2015년 일본의 한 잡지가 탈북 래퍼가 등장했다며 강 씨를 소개했다.
2015년 일본의 한 잡지가 탈북 래퍼가 등장했다며 강 씨를 소개했다.


● 뱀산에서 그림 그리던 소년
춘혁은 중국에 숨어 사는 동안 제대로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학교에 다닐 때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중국에 와서도 혼자 있을 때마다 그는 손에서 연필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뱀을 잡으려 산에 올랐다가도 멋진 풍경에 반해 그걸 종이에 옮기느라 몇 시간 보내기도 했다. 그림은 불안한 신분으로 사는 춘혁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왕청에 와서 그림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중국엔 한국 아이돌 바람이 불었는데, 아이돌 사진을 그대로 종이에 그려 문구점에 팔면 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아이돌 그림은 얼마쯤 지나 다시 연변에서 유행하던 호랑이 그림으로 바뀌었다.

며칠 동안 칠판만한 크기의 종이에 호랑이를 그려 가져가면 1500~2000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가 목재공장에서 일해서 받는 월급은 700위안이었다.

그림을 팔아 처음 큰 돈을 만진 날 어머니에게 가져다주었더니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서 돈을 훔쳐온 줄 알고 혼을 내려 했다. 사실을 말했더니 어머니는 갑자기 안색이 확 펴지면서 계속 그림을 그려 팔라며 기뻐했다. 춘혁은 드디어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 듯해 기뻤다. 그는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재미있는 골 안에 호랑이 나타난다는 속담처럼 그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어느 새벽 갑자기 공안이 문을 따고 집에 들이닥쳤다. 춘혁은 부모와 함께 중국 감옥에 끌려갔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공안이 차에 이들을 태웠다. 북송길에 오른 줄 알고 사색이 됐지만 그 공안은 어느 외진 곳에 차를 세우더니 모두 내리라고 했다. 어리둥절 내렸더니 빨리 가고 싶은 곳에 가라고 손짓했다.

떠나면 등에 총을 쏘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 겁에 질렸는데 공안이 먼저 차를 타고 가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체포되지 않은 사촌형이 6000위안이라는 거금을 뇌물로 주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춘혁의 가족은 북송을 면했다.

2019년 한류힙합문화대상 수상식에서 강 씨가 인기가수상을 수상한 모습.
2019년 한류힙합문화대상 수상식에서 강 씨가 인기가수상을 수상한 모습.


● 가족의 운명을 걸머쥔 3국행
석방은 됐지만 더는 무서워 살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때에는 방법을 몰랐다. 그때 베트남에 가면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소문이 연변에 돌았다.

가족 회의를 열었다. 결과 15살의 춘혁과 26살의 사촌형이 먼저 길을 떠나 한국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촌형은 문구점에 가서 중국 지도 한 부와 세계 지도 한 부를 샀다.

베이징을 거쳐 쿤밍까지, 그리고 쿤밍에서 베트남 국경마을까지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국에서 이미 3년을 산 춘혁은 중국어도 꽤 유창하게 했다.

2001년 6월 장맛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춘혁과 사촌형은 국경을 넘기 위해 산에 올랐다. 비 소리가 요란해 남부 국경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떠났지만, 장대비를 뚫고 산을 오르내리니 금방 지쳤다. 죽을힘을 다해 수풀이 울창한 산을 타고 가다보니 멀리 마을이 보였다. 내려가 보니 중국어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드디어 베트남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이들은 하루 넘게 마을과 연결된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 마침내 한 도시에 도착했는데, 거기엔 한국어로 간판이 씌어진 식당이 있었다. 들어가 도와달라고 하자 이들은 가까운 한국 영사관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어느 건물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자 관계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오더니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 왔냐”며 놀랐다. 영사관 건물 밖에서 북한 관계자들이 탈북자를 잡으려고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영사관 사람은 “우리는 한국에 보내줄 방법이 없다. 이왕 고생한 김에 캄보디아에 가면 한국으로 가게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면서 국경도시까지 버스표를 끊어 주었다.

버스를 타고 국경도시에 가니 캄보디아까지 오토바이로 태워다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에게 캄보디아로 가자고 했는데, 무슨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오토바이 배달부가 이들을 베트남 군부대로 데리고 갔다.

베트남 장교가 중국어 통역을 불러 이들을 취조하려고 하자 춘혁은 한국어로 대답했다. 통역이 “이 사람들 한국 사람들 같다고”고 하자 그 장교는 한참을 수소문해 이번엔 한국어 통역을 불렀다. 춘혁은 이번엔 중국어로 말했다. 그러자 그 통역은 “이 사람들은 중국인들”이라며 돌아갔다. 빨리 퇴근해야 되는데, 끌려온 두 청년이 협조를 하지 않자 짜증이 난 장교는 주머니를 뒤져 돈을 빼앗더니 가라고 했다. 포상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군부대 정문에 있던 오토바이 배달부는 이들이 석방된 것을 보자 군소리 없이 캄보디아로 데리고 갔다. 막상 가보니 자그마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캄보디아였다.

캄보디아에 내리자마자 이번엔 캄보디아 군인들이 오더니 시계와 신발까지 다 빼앗고 장교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감금된 지 하루가 지나자 그 장교가 이들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더니 잘 먹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프놈펜으로 데려다주겠다며 이들을 차에 태웠다. 한참 차를 타고 달렸는데 차가 어느 제방에 멈춰서더니 이들을 내리라고 했다. 맞은편에 다른 차가 와 있었는데 거기서 내린 사람이 장교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 장교는 사라지고 이들은 그 사람의 차를 탔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큰 독채 집이었는데, 그곳에 가니 탈북민 10여명이 먼저 있었다.

처음엔 이곳이 수감시설인줄 알았는데 먼저 있던 탈북민들이 “잘 왔다“고 환영해주어 이곳이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피난처임을 알았다. 그를 데라고 온 사람이 이곳 피난처를 운영하는 서 모 목사였다.

이곳에서 춘혁은 3개월을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벽에 큰 기독교 관련 그림을 그려주니 목사가 크게 기뻐하며 중국에 선이 있으니 부모님도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3개월 뒤 춘혁의 부모가 무사히 캄보디아까지 도착해 함께 한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목사는 피난처에 머무는 탈북 여성들에게 너무 많은 성폭력을 저질러 문제가 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2022년 남북통화문화센터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강 씨가 라이브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 한국에서 찾아온 방황

2001년 8월 30일 춘혁은 부모님과 함께 인천공항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미래가 창창한 16세 소년이었다.

그해 12월 말에 하나원을 나올 때 가족은 경남 밀양에 집을 받았다. 서울에 가고 싶었지만, 하나원에 배정된 서울 임대주택은 3채에 불과했다. 7대1의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은 지방 대도시도 아닌 소도시에 가야 했다.

그때 밀양엔 탈북민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중학교 2학년에 입학했는데, 주변에 소문이 나서 춘혁에게 와서 시비 거는 애들이 많았다.

어느 날 고등학생들이 몰려와서 “너 18살인데 왜 중2냐”고 놀리는 바람에 춘혁은 대판 싸우고 퇴학당했다. 다시 학교에 다닐 생각도 없어졌다.

2002년 말 가족은 서울 노원으로 이사 왔다. 얼마 뒤 부모님이 이혼을 하는 바람에 춘혁은 집을 나와 친구의 집에서 살았다. 어렵게 자유의 땅을 찾아왔지만, 부모님은 이혼을 택했고, 오래 살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2013년에 심근경색으로 돌아갔고, 아버지도 재작년에 병으로 돌아갔다.

서울에 올라온 뒤 7년 동안 춘혁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방황의 시기였다. 북한과 중국에선 먹고 사는 것, 안전하게 사는 것이 삶의 목표였는데, 그게 다 충족되자 그 다음에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건설현장에 가서 나이를 속이고 일을 했고, 배달도 했다. 그림과도 점점 멀어졌다.

2009년쯤 되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했던 친구들도 대학 학점이나 취직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보니 점점 말도 통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그림을 잘 그리니 미대에 가면 되겠다”며 적극 부추겼다. 춘혁은 방황의 시기를 접고 공부에 매달렸다. 중고등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넣었다.

일반적인 대학들은 탈북민을 특별전형으로 뽑아주지만 홍익대는 그렇지 않았다. 실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할 수 없었다.

시험장에 들어갔을 때 춘혁은 잠시 멍했다. 시험장 구석에 커피잔, 주전자, 배트민턴채, 공 등을 쏟아놓고 4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게 했다. 다른 수험생들이 열심히 그리는 것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부랴부랴 따라 그렸다.

“다 그려놓고 보니 제 그림만 이상해 보였어요. 다른 애들은 다 미술학원에서 배운 방식대로 그렸는데, 저는 그런 시험 방식도 모르고 시험장에 들어갔거든요.”

결과는 합격. 4대1의 경쟁을 뚫고 11학번 합격생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대학 기간도 생각과는 달랐다. 대학에 가면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워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재료 개념이나 기법, 방향성 등 이론만 많았다. 연필과 색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다가 유화를 그리는 법도 대학에서 배웠다.

그럼에도 다 미술 관련 새로운 이야기라 재미는 있었다. 첫 학기에 춘혁은 90여명 동창생 중 중간 정도의 학점을 받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2016년 미대를 졸업했다.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출품한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For the freedom’이라는 제목의 앨범이었다. 세상은 그를 화가가 아니라 탈북 래퍼라고 불렀다. 이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2021년 그린 작품. 남북은 한 핏줄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 작품은 올해 3월 KBS 2TV ‘노머니 노아트’라는 프로그램에서 720만 원에 팔렸다.
2021년 그린 작품. 남북은 한 핏줄이라는 의미가 담긴 이 작품은 올해 3월 KBS 2TV ‘노머니 노아트’라는 프로그램에서 720만 원에 팔렸다.


● 탈북 래퍼의 탄생

그가 대학을 다니던 2014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이 좀 보자는 연락을 해왔다. 알고 보니 ‘쇼미더머니’ 측에서 시즌3의 흥행을 위해 탈북민을 한 명 선정해 넣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김 국장 보기엔 강춘혁이 적임자로 보였던 것이다. 과거 어느 회식이 끝나고 노래방에 갔을 때 춘혁이 힙합 스타일의 노래를 잘 불렀던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춘혁도 힙합이 싫지는 않았지만, 대학 생활에 집중하느라 예능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탈북한 친구 두 명을 소개시켜 주었다.

얼마쯤 지났을 때 쇼미더머니3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가수 양동근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개시켜준 친구들이 랩 훈련을 받던 중 갑자기 TV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는 것. 처음에 그냥 랩을 배우는 줄 알았다가 얼굴이 공개되면 북한에 사는 가족 등이 피해를 볼까봐 숨어버린 것이다.

그들을 소개시킨 춘혁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럼 내가 나간다고 했다. 이 일은 춘혁이 북한 인권을 알리는 사명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랩을 하면서 춘혁은 “그림은 전시회장에 한정되지만, 힙합이나 랩은 티비와 유튜브에 올라 전 세계가 볼 수 있으니 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춘혁의 쇼미더머니3 출연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언론에서 탈북 래퍼가 나왔다고 기사가 쏟아졌다. 그가 랩을 부르는 모습이 담긴 유튜브도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했다.

학교에서도 홍보가 되니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TV에 출연한 뒤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과거엔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후엔 대학 구내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내친 김에 졸업과 함께 앨범도 냈다. 하지만 이후엔 전업이 화가인데, 래퍼로 너무 알려지는 것이 싫어 그림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음악 관련 요청은 점점 멀리했다.

● 배고픈 ‘북한 인권’ 화가의 길
졸업과 동시에 그는 전문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

미대를 나와도 다들 회사에 취직한다거나 미술 선생님이 되는 등 생업에 뛰어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의 학번에서도 배고프고, 언제 뜰지도 모르는 작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3명에 불과했다.

춘혁도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고픈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국에 오기 전까진 먹고 살기 위해 급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쌀과 물이 다 있는데, 또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았습니다. 제가 북에서 태어나 한국에 와서 미술을 전공한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북한에서 아직 고생하는 친구들을 위해 저는 그림으로 북한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업 화가의 길은 예상했던 것처럼 배고픈 길이었다.

재료비를 벌기 위해 다시 공사판에 나가 일을 했다. 돈을 벌면 재료를 사다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팔렸다고 해도 재료를 다시 사면 끝이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북한 인권을 고발한 작품은 어딜 가나 외면당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아트페어에 출품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만수대창작사 전시회가 열린다고 제 출품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국가 지원금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기저기 출품이 취소되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 시절 그는 사람들이 무서운 생각이 들어 6개월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술만 마신 적도 있다고 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망명할 생각도 있었다. 특히 유럽은 예술가들에 대한 망명 허용에 관대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남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니 남은 것이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3월엔 KBS 2TV ‘노머니 노아트’라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를 불러주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이 프로그램에 출품한 작품은 720만 원에 팔렸다. 전체 출연자 8명 중 그의 그림이 제일 먼저 팔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북한 인권을 주제로 한 삽화를 그려 달라, 웹툰을 그려달라는 등의 제안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요청을 받고 열심히 일해도 아직 먹고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2015년 9월 강 씨가 연사로 나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한인권 행사장에 북한 외교관들이 난입했다. 북한 영사가 연단에 올라와 마이크를 쥐고 떠드는 가운데 북한 외교관들이 앞줄을 차지하고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2015년 9월 강 씨가 연사로 나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한인권 행사장에 북한 외교관들이 난입했다. 북한 영사가 연단에 올라와 마이크를 쥐고 떠드는 가운데 북한 외교관들이 앞줄을 차지하고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 강춘혁이 존재하는 이유
강 씨는 지금까지 그린 그림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꼽았다. 이 작품은 전시만 하고 가격을 매긴 적이 없다.

작품에는 부스러져가는 얼굴에 슬픈 표정을 한 남성의 얼굴이 담겨있다. 한쪽 눈에는 태극기가, 다른 쪽 눈에는 인공기가 담겨있다. 춘혁은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탈북민의 자화상을 담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탈북민은 북한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국인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 구원해야 할 것들이 북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통일은 이런 기억을 안고 있는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조금 덜 먹고 힘들더라도 자식들에게 짐을 물려주지 말고, 우리 세대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가난한 화가 강춘혁이 이 땅에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화가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떠올 때마다 2015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차 북한인권주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당시 현지에선 탈북화가 선무 씨와 강춘혁의 그림 전시회가 열렸고 법학대학에서 북한 인권 관련 토론회도 열렸다. 토론회가 열리고 춘혁의 발언이 시작되는 순간 갑자기 문을 차고 북한 영사관 직원 십여 명이 들이닥쳤다.

그림 전시회 때부터 주변을 빙빙 돌며 “너네 일정을 다 아니 조심하라”고 협박하던 북한 외교관들이 급기야 토론회 현장에 쳐들어온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욕을 퍼부으며 들어오는 그들을 향해 춘혁도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인도네시아 경찰들이 급히 출동해 북한 외교관들을 끌고 나갔다.

“그때 솔직히 순간적으로 겁도 났고, 또 흥분도 됐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 그림이 위협이 되는구나, 내가 존재감이 있고 북한이 두려워하는 의미가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북한인권주간 행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북한 외교관들이 북한에 소환됐다고 하더군요.”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 인민이 자유를 찾는 날까지 그림으로 북한 인권을 고발하겠다는 강 씨의 결심은 단단하다.

“저도 화가인데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북한 인민들이 독재 하에서 신음하는 한 저는 그림으로 그들의 신음과 고통을 고발할 겁니다. 나중에 북한에 좋은 세상이 오면, 저는 캔버스를 들고 북한의 아름다운 곳들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마음껏 그릴 겁니다. 그날이 빨리 오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화가 강춘혁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