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추던 농구선수가 ‘길복순’ 광만이로…박광재 “괴물 배역에 갇히지 않는 배우 되고 싶다”[복수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5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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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프로 농구선수이자 지금은 배우로 활약 중인 박광재.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천만 영화 ‘범죄도시2’, 세계적 인기를 끈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시즌2와 ‘스위트홈’에 이어 전도연 주연의 영화 ‘길복순’까지…. 근래 가장 ‘핫’했던 작품들엔 시선을 확 잡아끈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덥수룩한 수염, 묵직한 눈빛을 가진 장신의 거구(巨軀)지만 웃으면 볼부터 귀까지 발그레해지는 순박한 매력의 배우 박광재(43)입니다. 채널A ‘천하제일장사’,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예능인으로도 활약하는 그가 10여 년 전엔 프로농구 선수였다고 합니다.

농구 명문 경복고, 연세대를 졸업한 그는 3점 슛도 잘 쏘는 ‘센터’로 주목 받았습니다. 2003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로 LG에 입단하며 프로의 세계에 입문했습니다. 하지만 녹록치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 농구선수였던 현주엽(LG), 서장훈(전자랜드)을 만나게 되면서 코트보단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유망주였지만 프로 입단 후부터 주전에서 밀리면서 차츰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2012년 무렵 연습 도중 발목에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은퇴를 결심하게 됩니다.

은퇴 후 반년 동안 칩거하던 그에게 어느 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무대 위에 서는 배우가 된 겁니다.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서 자코포 역으로 데뷔한 그는 지금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차곡차곡 ‘배우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아직 배우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과정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그를 <복수자들>이 만났습니다. 프로 입단 후 좌절을 겪었지만 극복해낸 농구 선수 박광재의 이야기(https://youtu.be/YM1LyqZjTP8)와 우연한 기회로 연예계 데뷔 후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을 보내고 있는 이야기(https://youtu.be/2J60dzWyq0k)를 동아일보 유튜브 ‘기웃기웃’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프로농구 올스타전에서 가수 원투와 함께 춤을 선보이는 박광재.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지금은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춤 추는 일이 많습니다. 운동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끼를 발산하는 것이 장려되는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박광재가 활동했을 때만 해도 다른 분야로 주목 받는 운동선수는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독 끼가 많았던 그는 코트에선 이단아 취급을 받았습니다.

―프로 농구 선수 시절 ‘딴따라’라는 말을 들으셨다고요?

“요즘은 운동선수들이 경기하다 말고 춤 추는 게 화제가 되기도 하고 좋게 봐주시는데 예전엔 안 그랬어요. 제가 프로농구 올스타전에서 춤 췄을 때, 팬들은 되게 좋아해주셨는데 감독님들은 별로 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쟤는 농구에 관심 없는 딴따라구나’ 이렇게들 생각하셨다고 해요.”

―이적 시장에서 ‘인기 없는 선수’였던 건가요?

“은퇴 후 술자리에서 허재 감독님을 만났는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우리나라에서 스크린플레이(농구에서 공 가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같은 팀 선수가 상대의 진로에 방해하는 기술)는 최고여서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다들 반대했다’는 거예요. 그때 감독님들 사이에서 저는 ‘농구 관심 없고 노는 거 좋아하고 연예계로 가고 싶은 애’로 통했다는 거죠.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속상하긴 했어요. 근데 뭐…. 농구를 정말 잘했으면 어떻게든 데려갔겠죠?(웃음)”

박광재가 프로 선수로 활약했을 당시, 한국 농구계에는 현주엽, 서장훈이라는 슈퍼스타가 있었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딴따라 선수’라는 오해도 있었지만 대진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농구계 최고 스타였던 현주엽, 서장훈과 같은 시기, 같은 팀에서 활동했는데, 주전 경쟁에서 밀려 코트보단 벤치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그는 “형들은 대한민국에서 정말 너무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경쟁으로 이기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프로 입단 1년차, 주전 선발에서 현주엽에게 번번이 밀렸던 그에게 회사는 ‘군대부터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 방침에 반발하다 군대에서도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상무’(국군체육부대)가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군생활을 하게 됩니다.

―상무가 아니라 일반 군생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년차 때는 주로 벤치에 있긴 했지만 저 스스로는 점점 기량이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2년차 때 더 열심히 해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고 싶었죠. 근데 회사에선 헤드업 선수(현주엽)가 있으니까 (어차피 주전으로 많이 못 뛸 테니) 군대부터 갔다 오라고 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입장에선 저를 배려해주신 거였어요. 근데 저는 어린 마음에 ‘형이랑 경쟁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했어요. 회사랑 싸우다가 결국 상무도 못 갔죠.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예요.”

발목 부상을 입은 그는 10여 년의 선수생활을 은퇴하기로 한다.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제대 후 오리온, 전자랜드로 소속팀을 옮긴 그는 10여 년간 활동했지만, 선수로서 큰 기회를 받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결국 2011~2012 시즌을 마치고 농구 유니폼을 벗습니다. 연습 중에 입은 발목 부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은퇴를 해야 했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나요?

“다친 직후엔 걷지도 못했어요. 발목이 꺾이면서 빨래가 짜이듯이 근육이 말리면서 정강이뼈도 부러진 거예요. 허벅지까지 통 깁스를 했죠. 수술 받고도 입원 생활을 한참 했어요. 큰 부상이었어요. 아직까지 발목에 철심이 박혀 있을 정도니까요.”

―농구에 20년 넘게 투자했는데 그만둘 때 좌절이 컸을 것 같아요.

“괴로워할 여유도 없었어요. 꾸준히 주전으로 뛰다가 그런 일을 겪었으면 심하게 아쉬웠을 텐데 나중엔 벤치 생활을 오래 했거든요. 선수로 많이 못 뛸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 타이밍에 다치게 된거였어요.”

은퇴했을 때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 누군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운동이었기에 끝도 빨리 다가왔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농구에 투자했고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입니다.

―심정이 복잡하셨을 텐데 재활치료는 어떻게 하셨나요.

“선수는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어야 하잖아요. 그땐 걷지도 못했으니까 솔직히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어요. 오직 재활에만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를 그만해야겠다고 결심한 후부터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면 좋을지 고민도 많이 했어요.”

―상황이 좋지 않으면 비관이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사람도 많잖아요.

“농구를 하면서 배웠던 것 중 하나가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는 인내심이에요. 선수생활을 하다보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과 압박을 많이 받아요. 버티고 참아낸 경험 덕분에 (부상 후 재활치료할 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겠는데?’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은퇴 후 배우로 활동 중인 박광재. FNC엔터테인먼트 제공
은퇴 후 배우로 활동 중인 박광재. FNC엔터테인먼트 제공
운동선수는 은퇴하면 주로 감독이나 코치 등 지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지인 추천으로 영화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것을 계기로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에 출연합니다. 배우로 살게 된 겁니다.

―농구선수에서 배우라니…. 너무 급격한 변화가 아닌가요.

“농구선수 출신 배우는 제가 처음이긴 하죠. 선수할 때부터 춤도 잘 췄고.(웃음) 끼가 있었어선지 선수 시절부터 엔터테인먼트 쪽에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많았어요. 그 중 한 지인이 제가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 ‘영화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감독님이 저 같은 이미지의 캐릭터를 딱 원한다면서요.”

―그게 어떤 영화였나요?

“연습을 엄청 했는데 영화가 준비 과정에 엎어졌어요. 그 영화를 찍으면서 뮤지컬 배우 김승대 씨를 알게 됐는데 그 친구가 뮤지컬 해볼 생각 없냐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뮤지컬은 자신 없었어요. 연기는 물론이고 노래도 잘해야 하잖아요. 제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느껴서 거절했는데 한 번만 만나보라고 하더라고요. 미팅인줄 알고 나갔는데 알고 보니 오디션 자리였어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오디션을 보신 거네요.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음악 감독님이 박장대소를 하셨어요. 왜 웃으신건지 궁금해서 나중에 여쭤봤거든요. 캐릭터에 너무 딱 맞는 사람이 와서 너무 놀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연기력이나 노래 실력보다는 이미지가 맞아서 캐스팅이 됐던 거죠.”

2013년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로 데뷔한 박광재.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몬테크리스토’ 이후 그는 매체 연기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2m가 넘는 장신에 독보적인 비주얼을 가진 그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화려해졌지만 비슷비슷한 배역이 주를 이룹니다. 건달, 깡패, 괴물…. 독보적 이미지가 ‘배우 박광재’에겐 기회인 동시에 한계로 작용한 겁니다.

―연기자는 이미지만으로 살아남긴 어렵잖아요. 배우로서 힘든 때도 있으셨나요?

“드라마 촬영 때였어요. 감독님이 대본보다는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대사가 끝나도 오케이 사인을 안 주시더라고요. 저로서는 (씬이) 끝났는데 계속 하라니 당황해서 땀이 엄청 났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겨울 장면을 찍었거든요. 옷에 땀이 엄청 젖다보니 저 때문에 재촬영을 하게 됐어요. 그때 정말 많이 위축됐어요. ‘옷 얇게 입고 왔냐’는 스태프들이 건네는 말들도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렸고요. 최대한 사람들 안 마주치려고 하고 밥도 차 안에서 혼자 먹었어요.”

―드라마는 중간에 하차할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버티셨나요?

“사전에 대본 공부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좋아하시니까 (대본에 없는) 말이나 행동을 미리 준비해갔죠. 12부작 드라마였는데 8부작 촬영할 때쯤 감독님이 ‘진작 그렇게 하지’라고 하셨어요. 칭찬은 받았지만 기분이 좋기보다는 계속 힘들었어요.(웃음) 그래도 그만두고 싶진 않았어요. 뭘 좀 제대로 해보고 나서 안 되면 그만둬야지, 지금 멈추는 건 스스로 용납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비슷한 역할 제안만 자꾸 들어오니, 연기자로서 고민이 되실 것 같아요.

“양날의 검이죠. 제가 독보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많은 감독님이 찾아주시지만 할 수 있는 배역은 한정적인 거죠. 하지만 감사한 기회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는 이유 중엔 제가 연기력이 부족한 탓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선생님한테 연기를 배우면서 꾸준히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노력 중입니다.”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 박광재.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괴물 캐릭터’에 갇히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은 천천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가 작품에서 맡은 배역을 보면 점점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스펙트럼도 넓어졌습니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에서는 청부살인업체 소속 킬러 광만이를 연기했고 8월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될 시리즈 ‘무빙’에서는 북한군 역을 맡았습니다.

―배우로서 꿈은 무엇인가요?

“솔직히 말해 저는 주연은 못 할 것 같아요. 대신 임팩트 있는 조연을 해보고 싶어요. 장르는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 그리고 격정 멜로도!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님을 정말 좋아해요. 감독님이 불러주신다면 노 개런티로 출연할 의향도 있습니다.(웃음)”

―배우로 잘 안 풀린다고 느끼실 때 농구선수를 그만둔 걸 후회하진 않으시나요?

“얼마 전 고등학교 농구부 모임이 있었어요. 대학 때까지 선수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은 친구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어떤 형은 사업이 잘 되어서 대표가 되고 또 저는 배우를 하고 있잖아요. 농구로 시작했다고 해서 농구로 성공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죠.

그럼에도 지금의 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직 배우로 성공한 건 아니지만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은 선수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운동했던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의 원동력은 그때 만들어진 거예요.“

<복수자들>과 인터뷰하는 박광재.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 캡처.
인터뷰 말미 그는 영화 ‘길복순’에 함께 출연한 배우 설경구가 건넨 조언을 소개했습니다. 배우 인생의 좌우명처럼 생각하게 됐다는 말인데요. 그가 배우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농구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농구선수’라는 이미지가 굳어질까 우려가 컸던 당시의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려 했다고 합니다.
“설경구 선배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의 차별점이 농구선수를 하다가 배우가 됐다는 건데 그걸 굳이 숨길 이유가 있냐. 배우뿐 아니라 농구 해설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장점이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후부턴 오디션 가서도 이렇게 자기 소개해요. ‘안녕하세요. 농구선수 하다가 지금은 배우를 하고 있는 박광재입니다.’라고요.”


복수자들
영화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칼을 갈았던 복수? 아닙니다. ‘킬빌’의 블랙맘바가 자신을 죽이려 한 보스를 처단하는 복수? 그것도 아닙니다. ‘복수자들’은 복수(複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일만 하고 살기엔 지루하다고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요? 본캐와 부캐, 양쪽을 오가는 복수자들이 직접 도전과 병행의 노하우를 전해드립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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