릉, 묘, 총[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92〉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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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둘이
의릉 보러 가서
의릉은 못 보고
꽃나무 한 그루 보고 왔다

넋이 나가서

나무엔 학명이 있을 테지만
서정은 그런 것으로 쓰이지 않는다
삶이라면 모를까

연우 아빠가 연우 때문에 식물도감을 샀다

웃고 있는 젊은 아빠가
아장아장 어린 아들을
그늘에 앉히고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풍경을
그렇게 많은 시에서 보고도
나는 쓴다
도무지 가질 수 없어서
아름답다 여긴다
포기하면 쉬워진다
(하략)

―김현(1980∼ )



꽃이 한창이다. 팍팍하게 살다가도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곱지 않은 꽃이 없고 멈춰서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설레는 마음이 옮을 것 같다. 잠시라도 봄소풍을 다녀와야 할 분위기다.

이 시에도 산책에 나선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의릉을 찾아갔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경종의 무덤은 왕의 것이 아니라 자연을 즐기려는 시민의 것이 된 지 오래다. 무덤을 보러 가는 이보다 흙냄새와 풀냄새를 찾으러 가는 이가 훨씬 많다. 그래서 시 속의 두 사람도 무덤을 보지 않고 꽃나무만 보고 왔다. 더불어 꽃나무를 즐기는 가족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 내 것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젊은 아버지가 행복하게 웃으며 아들에게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는 모습은 무척 이상적이다. 우리는 그런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쉽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이 필요하고, 웃기 위해서도 많은 비용이 필요하며, 어린 아들과 시간을 보내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 좋은 걸 아는데, 아름다운 걸 아는데 그걸 포기해야 하는 마음이 아프다. 때가 되면 꽃을 잘만 피우는 나무가 부러워지는 봄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의릉#자연#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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