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정은]영국인들의 때늦은 후회 ‘브레그렛(Bregret)’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7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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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다. 서방의 주요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전망치가 기존보다 하향 조정되면서 올해 ―0.6% 역성장이 예고됐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보다도 낮았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3주년을 맞아 리시 수낵 총리가 “브렉시트로 얻은 자유 덕에 엄청난 진전을 이뤄냈다”고 자찬한 기념 성명은 빛이 바랬다.

▷‘정치적으로는 대혼란, 경제적으로는 참사.’ 영국 일간 가디언을 비롯한 언론의 평가는 냉혹하다. “브렉시트는 망상”, “국가적 자해” 같은 노골적 비판이 쏟아진다. 브렉시트를 후회한다(Brexit+regret)는 의미의 ‘브레그렛(Bregret)’이라는 신조어도 퍼졌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EU로 되돌아가기 위한 재투표 의향이 있다”는 답변이 57%로 절반을 넘었다. 영국 여론이 단순히 후회의 감정을 넘어 실제적인 복귀 요구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의 무역거래 규모는 15% 줄었다. 각종 통관, 승인 절차 등 무역 장벽이 높아진 탓이다. 자동차 생산량부터 외국인 투자까지 각종 수치는 하락세다. 동유럽 노동자 행렬이 끊기면서 인력난이 심화했고, 물자 공급망 또한 적잖게 훼손됐다. 국가적 생산성 손실 규모는 290억 파운드(약 45조 원), 가구당으로 따지면 1000파운드(약 155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파업과 시위 횟수는 1970년대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영국이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됐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것은 영국인들 본인이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51.9%로 반대(48.1%)보다 높게 나왔다. 관료적 EU의 통제와 100억 파운드가 넘는 분담금 부담, 몰려드는 불법 이민자 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던 때다. 그러나 찬성표를 던졌던 이들조차 이제는 “정부에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돈이 많아질 거라고 했는데, 완전히 속았다”는 자영업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국민투표 당시 EU의 작동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를 던진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렉시트를 외쳤던 정치인과 선동가들은 침묵하고 있다. 책임을 따져 물으면 “정부가 탈퇴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거나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세계 경제 5위의 대국이었던 자국의 추락 앞에 속수무책이다. 시행착오 과정이라는 항변을 받아주기엔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막심하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결정을 변덕스러운 여론에 맡겼던 포퓰리즘 정치가 부른 결과일 것이다. 그 대가를 얼마나 더 오래, 더 크게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게 더 문제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브레그렛#영국인#때늦은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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