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성주]이공계 교수는 왜 국내 학술지를 외면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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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학평가에선 인문사회 영역만 인정
국내학술지 고교생과 기업까지 접근성 높아
활성화 되면 산학연 협력과 혁신 촉진할 것

이성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이성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세계 최초의 과학 학술지로 알려진 것은 1665년 시작된 영국왕립학회의 ‘철학회보’다. 그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주로 책을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책은 수년간 연구가 축적된 후에야 출판되므로 연구 내용을 공유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연구 내용의 전달 범위 또한 제한적이었다. 이에 과학자들은 연구 결과를 빠르게 공유하고자 ‘학술지’라는 매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DNA 이중나선 구조에 대한 왓슨과 크릭의 연구는 1953년 1월 말 아이디어를 얻어 3월에 모형을 완성한 뒤 4월 25일자 네이처에 결과가 실렸다. 그 분량 또한 1쪽에 불과했다고 하니, 빠른 정보 교류에 최적화된 방식이었다.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는 네이처와 같은 해외 학술지를 통해 발표될 수도 있지만 국내 학술지에 실릴 수도 있다. 실제 한국연구재단에서 관리하는 국내 학술지는 2022년 6월 1일 기준 무려 2670종에 달한다. 문제는 과학기술 분야 연구자 다수가 국내 학술지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지금의 학술지는 초기의 정보 교류 목적 외에도 연구자의 업적 평가 목적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업적 평가는 개인의 채용, 승진, 연구과제 수주뿐 아니라 연구자가 속한 기관 평가에도 밀접하게 연계된다. 즉, 현재 대학 평가에서 국내 학술지 논문은 인문사회 영역에서만 인정된다. 대학 평가에 민감한 국내 대학들은 이공계 교수의 업적 평가 기준에서 국내 학술지를 아예 제외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 성과들은 대부분 해외 학술지에 발표되고 국내 학술지의 질적 수준과 국제 경쟁력은 점점 낮아질 위험에 처해 있다.

물론 우수한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에 발표되어 과학기술 리더십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학술지가 추구했던 초기의 정보 교류 목적을 떠올리면 해외 학술지 못지않게 국내 학술지의 역할도 중요하다. 국내 학술지는 해외 학술지에 비해 정보의 접근성이 높기 때문에 그 파급 범위가 국내 고등학생에서 기업까지 광범위하다. 모국어를 사용하므로 정보 교류의 효율도 높다. 해외 학술지에 비해 게재 과정의 어려움이 덜하고 영어에 능숙하지 않아도 논문을 작성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사례로 한 연구들이 많아 국내 활용도 또한 높다. 무엇보다 국내 학술지는 민간기업이나 연구소가 공동연구 파트너를 찾을 때도 자주 참고한다. 지난 10여 년을 되돌아보면, 공동연구 제안은 대부분 국내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국내 학술지는 학술 생태계의 발전뿐 아니라 산학연 혁신 주체들의 연계·협력에도 기여해 왔다.

1998년부터 한국연구재단에서 학술지 등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학술지를 평가하여 일정 수준 이상일 경우 국가가 인증하는 제도로, 도입 당시 56종에 불과하던 등재학술지가 급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2015년부터는 다시 우수등재학술지를 선정하고 있다. 현재는 우수등재학술지가 71종, 등재학술지가 2342종, 등재후보학술지가 257종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증 제도이든 인증 대상에 실질적인 혜택이 주어져야 그 효과가 나타난다. 최근 한국연구재단이 세계적 출판사인 엘스비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간소화된 절차를 통해 우수등재학술지를 엘스비어의 학술정보 데이터베이스(DB)인 스코퍼스(Scopus)에 등재되도록 지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과학기술 분야 우수등재학술지에 대해서만은 엄격한 심사와 관리가 이루어지되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혜택을 주는 것이 어떨까. 기관 평가와 교수 업적 평가, 한국연구재단의 과제 평가에 포함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를 과학기술 선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특히 국내학술지는 언어장벽으로 인해 다소 저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챗GPT(ChatGPT)와 같은 언어 모델의 발전 속도를 보면 국내 학술지가 가지고 있던 언어장벽도 머지않아 극복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혁신을 선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기업 다음으로 참여한 한국 기업의 수가 많았으며, 한국 기업 134개사가 혁신상 수상 기업으로 선정되어 전체의 30% 이상을 차지했다. 이 중 111개사가 벤처·창업기업이다. 이러한 혁신적 아이디어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개별 기업의 노력을 넘어 산학연 모두의 협력이 필요하다. 국내 학술 생태계의 활성화는 국내 연구 결과 교류와 산학연 협력의 시너지를 높여 국가 혁신 시스템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일 것이다.


이성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국내학술지#대학평가#이공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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