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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배우고 가르치는 ‘어른 놀이터’ 갈수록 절실… “공간 확보가 당면과제”[서영아의 100세 카페]

입력 2022-12-03 03:00업데이트 2022-12-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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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를 위한 학교 공감 확산… 佛 지자체 주도 은퇴자 대학 시초
英, 시민 자율 운영 강좌로 발전… 공부 매개 이웃소통-고독 해법으로
국내선 2013년 ‘인생학교’ 큰호응… 수강생 점차 늘자 2호교 개설까지
“인생 후반을 풍요롭게” 인식 확산… 공공 빈 공간 활용할 여지 많아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오늘은 뭐하지’, ‘오늘 어디 가지’….”

은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현실 고백 중 하나는 ‘갈 곳’이 없다는 거다. 익숙했던 출퇴근에서 해방된 즐거움은 잠시, 여행이건 등산이건 언제까지나 이어지긴 어렵다. 건강하려면 많이 움직이라는데, 현실은 ‘집콕’ 신세. 거실 소파에 앉아(혹은 누워) TV 리모컨이나 돌리다가 ‘삼식이’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처럼 ‘갈 곳’은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시니어들에게도 여전한 고민이자 노년 고독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알고 보면 이 고민은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어른들을 위한 학교
많은 나라에서 19세기 말만 해도 40세이던 평균수명이 1970년대에는 두 배로 늘었다. 숫자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중노년층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은퇴 후 무엇을 할지는 인류의 고민이 됐다.

시니어가 가르치고 시니어가 배우는 자율대학 U3A의 수업 장면. 1982년 창립된 U3A는 현재 영국 전역 1000여 곳에서 43만 명이 수강하는 시니어 자율대학으로 성장했다. U3A 홈페이지 캡처시니어가 가르치고 시니어가 배우는 자율대학 U3A의 수업 장면. 1982년 창립된 U3A는 현재 영국 전역 1000여 곳에서 43만 명이 수강하는 시니어 자율대학으로 성장했다. U3A 홈페이지 캡처
유럽에서 가장 앞서 고령화가 시작된 프랑스(1865년에 고령화사회, 1979년에는 고령사회에 도달)가 이들에게 공부와 소통의 장을 제공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프랑스는 1970년대에 지자체와 대학이 나서 은퇴자를 위한 대학 U3A(University of 3rd Age)를 만들었다. 인생주기를 크게 만 24세 이하의 제1기(학령기), 25∼49세의 제2기(사회활동기), 50∼74세 제3기(은퇴 후), 75세 이상의 제4기(임종기)로 구분할 때, U3A는 보다 풍요로운 제3기를 위한 대학인 셈이다.

이 물결은 1980년대 영국으로 옮겨가면서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학교 운영 주체가 지자체에서 시민으로 바뀐 것. 은퇴 전후의 시니어들이 자율적으로 서로를 가르치고 교류하는 지역대학 개념이다. 정부 보조 없이 회비만으로 다양한 강좌가 이뤄지고 학교 운영과 강사는 모두 자원봉사자가 맡는다.

1982년 창립된 영국 U3A 홈페이지에는 ‘더 이상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는 40대 이상이 모여 즐겁게 배우는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는 국제적인 자선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Learn, Laugh, Live(배우자, 웃자, 인생을 즐기자)’를 슬로건으로 현재 영국 전역의 1057개 대학에서 43만 명이 공부 중이다. 회비는 연간 20파운드(약 3만1600원)인데, 공간 임차료나 비품비로 쓰인다. 캠퍼스는 커뮤니티 시설이나 교회, 도서관, 대학 강의실을 빌려 쓰기도 하고 개인의 집이 되기도 한다. 예술, 언어, 신체활동, 토론, 게임 등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있고 배우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강좌가 개설된다. 이런 개념의 U3A는 호주 캐나다 등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전수경 한국노년교육학회 총무(남서울대 교수)는 “영국의 U3A는 자기 돕기(self help·自助)의 개념이 강하다. 당초 대학(university)이 형성될 때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고 일깨워준다. U3A 홍보 영상은 “회원의 91%가 새 친구를 만들었고 동료들로부터 든든한 지지를 받는다고 느낀다”고 전한다. 이렇게 U3A는 시니어들이 공부를 매개로 이웃과 소통하고 고독을 치유하며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영국 정부는 2018년 1월 ‘고독은 국가가 나서서 대처해야 할 사회문제’라며 내각에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를 신설했다. 외로움과 고립이 건강과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방치하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매일 놀이터 가는 기분” 한국의 인생학교
식당을 빌려 진행된 위례인생학교 회원 워크숍. 위례인생학교는 수강 신청생이 봄학기 110명에서 가을학기에는 200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위례인생학교 제공식당을 빌려 진행된 위례인생학교 회원 워크숍. 위례인생학교는 수강 신청생이 봄학기 110명에서 가을학기에는 200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위례인생학교 제공
한국에도 U3A의 철학을 표방한 학교가 있다. 2013년 문을 연 ‘분당 아름다운 인생학교’가 그것. 설립자이자 첫 교장을 맡았던 백만기 씨는 ‘U3A’ 대신 ‘인생학교’란 이름을 붙이고 이런 학교 100개를 세우겠다는 평생 목표를 세웠다. 분당인생학교는 현재 약 150명의 회원이 25개 강좌를 운영하는데, 월 회비 1만 원을 내면 세 강좌까지 수강할 수 있다. 하루 5, 6개씩 강좌가 빼곡히 있는데, 이 중엔 무상급식 시설 ‘안나의 집’에서 배식 봉사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백 씨는 분당인생학교가 궤도에 오르자 2020년 교장직을 후임에게 넘기고 위례에 두 번째 인생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지난해 10월 100세 카페에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사이 괄목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강좌는 당시 10개에서 21개로 늘었고 수강생은 올해 봄학기 110명에서 여름 150명, 가을 203명으로 분기마다 40∼50명씩 불어나고 있다. 은퇴를 준비하는 40대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5060세대가 주축을 이루는데 외국어, 경제금융 공부 등 학구적 열기가 가득하다고 한다.

최근 백 씨가 짧은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군 출신 분당인생학교 회원이 촬영을 배운 뒤 영화입문학 강의를 열었는데 수강생들에게 ‘나에게 인생학교란’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회원들은 저마다 “인생학교 없는 노후는 상상할 수 없다”거나 “인생학교는 나의 놀이터”라고 답하며 즐거워했다.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지낸 서문규 현 분당인생학교 교장은 “은퇴 후 무위도식하던 내게 시니어들과 어울리는 바람직한 삶을 배우는 장이자 놀이터”라고 답했다. 이 밖에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고,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인생 후반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곳” “내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곳” 등의 답변도 있었다. 역시 가장 좋은 놀이는 공부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타인과의 소통인 듯하다.
○ 한국에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나
지난달 11일 열린 한국노년교육학회 추계 학술대회에서 분당, 위례인생학교 사례를 발표하는 백만기 씨. 서영아 기자 sya@donga.com지난달 11일 열린 한국노년교육학회 추계 학술대회에서 분당, 위례인생학교 사례를 발표하는 백만기 씨.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지난달 11일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열린 추계 한국노년교육학회에서는 분당과 위례인생학교의 현황 소개에 이어 ‘한국에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는가’를 놓고 토론이 있었다. 한국의 노년교육이 대부분 관에 의해 주도되면서 강의 위주의 수준에 멈춰 있고 참여자들도 수동적이라거나,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인 시니어들이 좀더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의견이 나왔다. 분당과 위례에서의 성공에 대해 “그 지역이니까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역사회의 수준이 반영됐다는 얘기다.

백 씨는 좀더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바로 공간 문제다.

“자신의 지역에도 인생학교를 만들고 싶다며 많은 분들이 찾아오는데, 공간 마련의 어려움 때문에 좌초하는 경우가 많다. 공간만 확보된다면 시니어들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시스템을 통해 자아실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지자체도 예산을 내줄 필요가 없으니 부담이 가벼울 것”이란 얘기다.

그에 따르면 지자체나 공공기관, 구청, 도서관 등에는 시민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줄 여력이 있어 보이는 곳이 적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로 남아도는 교실이나 비어가는 지방대학, 나아가 전국에 산재한 경로당 6만여 곳 중 극히 일부라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

백 씨는 “인생학교 모델은 출범은 어렵지만 조금만 기틀이 잡히면 자립할 수 있다”며 위례인생학교를 예로 들었다. 내년 말이면 현재 이용 중인 공간(위례스토리박스) 사용기한이 끝나지만 월 회비만으로 사무실 임차료와 관리비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출범 2년여 만에 자립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처럼 공공이 지역주민의 자발적인 교육사업이 자립할 수 있도록 1∼2년 정도 인큐베이팅 공간을 제공해주는 방안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올해 한국의 고령자는 900만 명(17.5%)을 넘어섰고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매년 고령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은퇴를 바라보는 4050세대를 더하면 그 숫자는 더 커진다. 급증하는 시니어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도와 성숙도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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