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소통하는 즐거움…은퇴자도 ‘갈 곳’이 필요하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4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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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오늘은 뭐하지’, ‘오늘 어디 가지’….”

은퇴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현실 고백 중 하나는 ‘갈 곳’이 없다는 거다. 출퇴근에서 해방된 즐거움은 잠시, 여행이건 등산이건 친구만나기 건, 언제까지나 이어지긴 어렵다.

건강하려면 많이 움직이라는데, 현실은 ‘집콕’ 신세. 거실 소파에 앉아(혹은 누워) TV리모콘이나 돌리다가 ‘삼식이’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처럼 ‘갈 곳’은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시니어들에게도 여전한 고민이자 노년 고독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알고보면 이 고민은 전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위례 인생학교 갤러리투어반 회원들이 전시회를 찾아 도슨트(전시해설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위례인생학교 제공
위례 인생학교 갤러리투어반 회원들이 전시회를 찾아 도슨트(전시해설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위례인생학교 제공

어른들을 위한 학교
많은 나라에서 19세기 말만 해도 40세이던 평균수명이 1970년대에는 두 배로 늘었다. 숫자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젊고 건강한 중노년 층이 쏟아져나왔다. 이들이 은퇴 후 무엇을 할지는 인류의 고민이 됐다.

유럽에서 가장 앞서 고령화가 시작된 프랑스(1865년에 고령화사회, 1979년에는 고령사회에 도달)가 이들에게 대학을 개방해 공부와 소통의 장을 제공했다.

1973년부터 지자체와 대학 등이 나서 은퇴자를 위한 대학 U3A(University of 3rd Age)를 만든 것. 인생주기를 크게 만 24세 이하의 제1기(학령기), 25~49세의 제2기(사회활동기), 50~74세 제3기(은퇴후), 75세 이상의 제4기(임종기)로 구분할 때, U3A는 보다 풍요로운 제 3기를 위한 대학인 셈이다.

돈벌이와 육아 부담에서 벗어난 은퇴자들을 재교육해 인생후반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다는 취지였다.

영국  U3A 회원이 수채화 강좌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U3A홈페이지 캡처
영국 U3A 회원이 수채화 강좌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U3A홈페이지 캡처


U3A창립 40주년을 맞아 런던지부는 일주일간 런던을 함께 걷는 캠페인을 펼쳤다. U3A홈페이지 캡처
U3A창립 40주년을 맞아 런던지부는 일주일간 런던을 함께 걷는 캠페인을 펼쳤다. U3A홈페이지 캡처
시민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자율대학
이 물결은 1980년대 영국으로 옮겨가면서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학교 운영 주체가 지자체에서 시민으로 바뀐 것. 은퇴 전후의 시니어들이 자율적으로 서로를 가르치고 교류하는 지역 대학 개념이다. 정부 보조 없이 회비만으로 다양한 강좌가 이뤄지고 학교 운영과 강사는 모두 자원봉사자가 맡는다.

1982년 창립된 U3A 홈페이지에는 ‘인생에서 자신의 세 번째 나이(their 3rd age)에 접어들어 풀타임으로 일하지 않는 40대 이상이 모여 즐겁게 배우는 기회와 동기를 제공하는 국제적인 자선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Learn, Laugh, Live(배우자, 웃자, 인생을 즐기자)’가 슬로건으로 현재 영국 전역의 1057개 대학에서 43만 명이 공부중이다.

회비는 연간 20파운드(약 3만 1600원)인데, 학비가 아니라 공간임대료나 비품비로 쓰인다. 캠퍼스는 커뮤니티 시설이나 교회, 도서관, 대학 강의실을 빌려 쓰기도 하고 개인의 집이 되기도 한다.

다루는 과목은 그야말로 삼라만상. 예술, 언어, 신체활동, 토론, 게임 등 가르칠 수 있는 강사가 있고 배우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강좌가 개설된다.

코로나19 탓에 한동안 온라인수업이 활성화됐는데 장애나 질환 등으로 집밖에 나가기 어려운 회원들의 참여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전수경 한국노년학회 총무(남서울대 교수)는 “U3A는 자기 돕기(self help), 즉 자조(自助)의 개념이 강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대학이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비형식적 학습조직에도 대학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는 이유”라고 일깨워준다.

U3A 홍보영상은 “회원의 91%가 새 친구를 만들었고 동료들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는다고 느낀다”고 전한다. 이렇게 U3A는 시니어들이 공부를 매개로 이웃과 소통하고 고독을 치유하며 자아실현을 도모하는 장소로 자리매김됐다.

“서로 마주보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어요” 은퇴한 남성들을 위한 ‘멘즈 쉐드’는 목공이나 수리 등의 작업을 매개로 해 자연스런 소통을 지향한다. 멘즈 쉐드 홈페이지 캡처
함께 작업하며 소통… ‘남자들의 작업실’
영국사회에서 고독에 대한 고민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으로 연결돼 있다. 영국 정부는 2018년 1월 ‘고독은 국가가 나서서 대처해야 할 사회문제’라며 아예 내각에 고독부(Ministry for Loneliness)를 신설했다. 외로움과 고립이 건강과 행복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방치하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고독에는 남성이 더 취약하다는 점에 착안한 활동도 펼쳐지고 있다. 은퇴남성들을 위한 ‘남자들의 작업실’(men‘s shed)이 2013년 이후 영국 전역에 확산되고 있는 것.

이름에서 드러나듯, 퇴직한 중년남성들이 모여 공구를 손질하고 전기제품이나 자동차 수리, 목공 원예 등을 함께 하며 은퇴 이후의 무기력과 외로움, 정신적 소외 등을 이겨나가자는 운동이다. 멘즈 쉐드는 1990년대 호주에서 먼저 태동했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멘즈쉐드는 영국에서 현재 571개소가 운영되고 있고 1만 3700여명이 이용 중이다. 운영취지에 대해서도 꽤 섬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중년 남성들은 대체로 여성보다 사회적 유대를 맺는 데 서툴고, 남에게 잘 도움을 청하지 않으며 그래서 사회적 고립에 취약하다. 은퇴와 함께 정체성 혼란이나 목적 상실감도 커져 있다”며 작업실을 통한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멘즈 쉐드에서도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다반사. U3A와의 차이는 공동작업이라는 매개를 활용해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들의 작업이 학교나 공원, 교회 등 지역사회와 공공시설에 기여하면서 남을 돕는 보람까지 맛볼 수 있다. 간판과는 무관하게 점차 작업실 참가를 원하는 젊은이나 여성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1년에 2회 여는 분당 인생학교 회원 워크샵에서. 코로나 이전에는 이렇게 야유회를 겸해 진행됐다. 백만기 씨 제공
1년에 2회 여는 분당 인생학교 회원 워크샵에서. 코로나 이전에는 이렇게 야유회를 겸해 진행됐다. 백만기 씨 제공
한국의 U3A, 인생학교도 성황
한국에도 U3A의 철학을 표방한 학교가 있다. 2013년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문을 연 ‘분당 아름다운 인생학교’가 그것. 설립자이자 첫 교장을 맡았던 백만기 씨는 ‘서드 에이지 대학’이란 어려운 이름대신 인생학교란 이름을 붙이고 이런 학교 100개를 세우겠다는 평생 목표를 세웠다.

분당 인생학교는 현재 약 150여 명의 회원들이 25개의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들은 월 회비 1만원을 내면 강좌 세 개까지 듣는다. 시간표를 보면 하루 5~6개씩 강좌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강좌 중에는 무상급식 시설인 안나의 집에서 배식 봉사하는 팀도 있다.

위례인생학교 회원 워크샵. 학교 사무실이 있는 위례스토리박스 레스토랑을 빌려 진행됐다. 올해 위례인생학교는 반년만에 두배의 속도로 성장했다. 위례인생학교 제공
위례인생학교 회원 워크샵. 학교 사무실이 있는 위례스토리박스 레스토랑을 빌려 진행됐다. 올해 위례인생학교는 반년만에 두배의 속도로 성장했다. 위례인생학교 제공


백 교장은 분당 인생학교가 궤도에 오르자 교장직을 후임에게 넘기고 2020년 성남시 수정구 위례신도시에 두번째 인생학교를 세웠다. 이 곳은 지난해 10월 100세 카페에 소개한 바 있는데 불과 1년만에 괄목할 정도로 성장해 있다. 강좌는 당시 10개에서 21개로 늘었고 수강생은 올해 봄학기 110명, 여름학기 150명, 가을학기 203명으로 분기마다 40~50명씩 불어나고 있다.

위례인생학교의 특징은 회원층이 조금 젊다는 것. 은퇴를 준비하는 40대에도 문호를 개방했고 5060세대가 주축을 이루는데, 외국어나 경제금융 공부 등 학구적 열의가 가득하다고 한다.
“매일 놀이터 가는 기분으로”
최근 백 씨가 짧은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군 출신 분당인생학교 회원이 촬영을 배운 뒤 영화입문학 강의를 열었는데, 수강생들에게 ‘나에게 인생학교란’을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회원들은 저마다 “인생학교 없는 노후는 상상할 수 없다”거나 “인생학교는 나의 놀이터”라고 답하며 즐거워했다.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역임한 서문규 현 분당인생학교 교장은 “은퇴 후 무위도식하던 내게 시니어들과 어울리는 바람직한 삶을 배우는 장이자 놀이터”라고 답했다.

이밖에 “아침에 일어나서 갈 곳이 있고,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인생 후반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곳”, “내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곳” 등의 답변도 있었다.

역시 가장 좋은 놀이는 공부이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타인과의 소통인 듯하다.

지난달 11일 열린 한국노년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분당과 위례의 인생학교 사례를 발표하는 백만기 교장.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지난달 11일 열린 한국노년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분당과 위례의 인생학교 사례를 발표하는 백만기 교장.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한국에서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나
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열린 한국노년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는 분당과 위례 인생학교의 현황소개에 이어 ‘한국에서는 왜 U3A가 확산되지 못하는가’를 놓고 토론이 있었다.

한국의 노년교육이 대부분 관에 의해 주도되면서 강의 위주에 멈춰 있고 참여자들도 수동적이라거나, 교육의 주체이자 대상인 시니어들이 좀더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등 의견이 나왔다. 분당과 위례에서의 성공에 대해 “그 지역이니까 가능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역사회의 수준이 반영됐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시니어 연조쯤 되면 누구나 남을 가르칠 정도로 잘하는 것 한가지씩은 있다”거나 “학력이 부족한 할머니가 손뜨개 교실을 열어 인기를 얻는 등 지역 회원들의 수요에 맞는 강의는 얼마든지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섰다.

백만기 교장은 좀더 시급하고도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바로 공간문제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도 인생학교를 만들고 싶다며 많은 분들이 찾아오는데, 공간 마련이 어려워 좌초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공간만 확보된다면 시니어들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시스템을 통해 자아실현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지방자치단체도 강사료나 인건비 등 예산을 내줄 필요가 없으니 부담이 훨씬 가벼울 겁니다.”
공간확보의 어려움이 걸림돌
그에 따르면 지자체나 공공기관, 구청, 도서관 등에는 시민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줄 여력이 있어 보이는 곳이 적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로 남아도는 교실이나 비어가는 지방대학, 나아가 전국에 산재한 6만여 개소의 경로당 중 극히 일부라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

백 씨는 “인생학교는 출범은 어렵지만 조금만 기틀이 잡히면 자립할 수 있다”며 위례 인생학교를 예로 들었다. 내년 말이면 현재 이용 중인 공간(위례스토리박스) 사용기한이 끝나지만 학교는 그 사이 월회비만으로 사무실 임대료와 관리비를 감당할 수 있게 성장했다는 것. 출범 2여년 만에 자립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이처럼 공공이 지역주민의 자발적인 교육사업이 자립할 수 있도록 1~2년 정도만 인큐베이팅 공간을 제공해주는 방안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올해 한국의 고령자는 900만 명(17.5%)을 넘어섰고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매년 고령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은퇴를 바라보는 4050세대를 더하면 그 숫자는 더 커진다.

이들 급증하는 시니어들의 삶의 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도와 성숙도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인생 후반, 더 중요해지는 ‘돈 건강 행복’
풍요로운 100세 인생을 맞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돈과 건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갖춰지는 게 아니고 30~40대부터 차근차근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합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특히 인생 2막을 잘 맞이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돈과 건강 행복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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