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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스파이더 가면’ 뒤의 권력과 외로움[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2-01-17 03:00업데이트 2022-01-17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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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보고
마블 영화 스파이더맨의 세 번째 시리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평행세계가 열려 한데 모인 세 명의 스파이더맨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입을 모은다. 사진 출처 IMDb
※ 이 글에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열면 꽤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얼핏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 뒤에는 그 사람 나름의 고충이 숨어 있다. 누군가 너무 돈을 밝힌다? 그는 어쩌면 가족을 간병하기 위해 큰돈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누군가 울상을 하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갑자기 대소변이 급한지도 모른다. 언젠가 괴한이 관청 숙직실에 똥을 누고 사라진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는데, 정말로 급하면 어디에선들 용변을 보지 못하랴. 정부에 분노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그러나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약속한 대로 이 나라를 발전시킨다면 그 혜택은 국민이 입을 것이니, 그 대의(大義)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토록 힘든 일을 자발적으로 하려 드는 것은 경이롭다. 특히 나처럼 휴식을 열망하는 사람에게는, 선거 유세부터가 너무 고단해 보인다. 힘든 일은 피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아침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일정을 소화하고, 반대 진영으로부터 욕을 먹을 대로 먹고, 가족들에게까지 폐를 끼쳐가며 마침내 집권했다고 한들, 퇴임 후에 감옥에 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저 힘든 길을 도대체 왜? 사회 공헌이라면, 잔잔하고 보이지 않게 할 방법들도 얼마든지 있다. 대체 왜 저 야단법석을 해가며 권력을 쥐려는 것일까?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맛이 좋아서? 큰 자원을 배분하는 데서 오는 자기효능감 때문에? 가문의 영광이라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에게 통치받기 싫어서?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기 싫어서? 태어난 이상 한번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서? 그놈의 ‘스웩’ 때문에?

컨디션 난조로 판단을 그르친 끝에 대선 후보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니, 이미 출마한 자신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 어, 어 하다 보니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되었고, 내릴 수가 없어서 이 지경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진실이 무엇이든, 고된 유세 과정 도중에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올 것이다. 그때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권한다. 보도 자료 뿌려서 사람 번거롭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혼자 마음을 열고 보기를 권한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는 대선 후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 있다. 명대사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를 듣다 보면, 큰 권력이라는 것이 마냥 좋은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책임이 따르는 골치 아픈 물건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스파이더맨처럼 엄청난 능력을 보유하게 되면, 세상 문제를 도외시하기 어렵다. 동분서주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스파이더맨같이 큰 힘을 가진 공적 인물은 좀처럼 쉴 수 없다.

그뿐이랴. 수퍼히어로가 되면, 단일한 인격으로 살 수 없다. 철학자 니체가 그러지 않았던가. 모든 심오한 정신은 가면을 필요로 한다고. 심오한 공적 역할을 해내기 위해 주인공은 늘 가면을 써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면, 스파이더맨 복장을 벗을 수 있지 않냐고? 천만에. 존재의 절반은 이미 스파이더맨이다. 그가 가면을 벗고 평상복 차림을 한다는 것은, 자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또 하나의 가면을 쓴다는 것이다. 이제 가면 뒤의 진면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가면이 된다.

16세기 후반 얀 샤들러가 ‘신뢰’와 ‘기만’을 의인화해 그린 판화. 가면으로 가득 찬 기만을 거꾸러뜨린 신뢰가 우정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적인 인물은 가면을 쓰게 되고, 가면을 쓴 자는 진정한 친구를 얻기 어렵다. 16세기 후반 유럽의 예술가 얀 샤들러가 ‘신뢰(Fiducia)’와 ‘기만’을 의인화한 판화를 보라. ‘신뢰’는 가면으로 가득 찬 ‘기만’을 거꾸러뜨리고, 오른손에는 우정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있다. 깃발이 보여주듯이, 우정이란 가면을 벗어던진 심장이 악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친구뿐 아니라 적도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 가면이 필요하고, 가면을 벗지 않는 한 그에게 진정한 우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은 저주이다. 앞으로 결코 보통 사람으로 살 수 없게 된다는 저주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수의 친구들만큼은 자신의 모순을 이해해 줄 거라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심오한 공적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공(公)과 사(私)를 두루 알아줄 사람들은 결국 사라지게 된다고. 그래서 주인공은 선택을 요구받는다. 세상을 구하는 스파이더맨으로 살고자 하면,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잊혀질 거라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네 정체를 알 수 없게 될 거라고. 그래도 이 길을 가겠냐고?

여기까지 영화를 본 대선 후보는 자신이 숙직실의 ‘거대한 엿’이 된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와야 옳다. 전문용어로 ‘현타’(허탈함을 동반한 현실 자각)가 와야 옳다. 권력자로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자신은 아주 외로워지겠구나, 업무를 마치고 복귀할 따뜻한 집 따위는 없겠구나, 라는 서늘한 느낌이 엄습해야 옳다.

실로, 자신을 살뜰하게 이해해주던 가족들과 친구들로 북적이던 호시절은 갔다. 영화의 말미에서 피터 파커는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빌헬름 함뫼르쇠이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텅 빈 아파트로 오게 된다. 이 외로운 순간을 피하고 싶은 사람은 권력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극히 공적인 삶을 살고자 사람은 솔기 없이 통합된 인격을 가지기는 글렀다는 예감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삶을 누리기는 글렀다는 불안을, 감내해야 한다. 눈물을 다 훔쳤으면, 어두운 극장을 나와 유세장으로 돌아오라. 건투(?)를 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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