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나 못 남긴 서민들의 ‘위대한 유산’, 애정으로 지켜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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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여는 사람들’〈3〉이영화 광주 비움박물관장
100년 전 쓰인 민속품 3만 점 모아… 2016년 지역 유일 사립박물관 열어
시증조부의 옛 담뱃대-안경집부터… 주변서 버려지는 생활도구들 수집
“국가-자치단체, 더 관심 가져주길”

이영화 비움박물관장이 지난해 12월 31일 박물관에 전시된 대나무로 만든 닭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나무 닭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총알이 뚫지 못한다며 농민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이영화 비움박물관장이 지난해 12월 31일 박물관에 전시된 대나무로 만든 닭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나무 닭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총알이 뚫지 못한다며 농민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일 광주 동구 전남여고 건너편, 옛 광주읍성의 동문인 서원문 터에 자리한 5층 건물. 현관 입구 양쪽에는 지름 70∼80cm가량의 나무 기둥 3개가 바닥에서 옥상까지 솟아 굳은 심지(心志)를 표현하는 듯했다. 또 비움박물관이라는 현판 밑에 한편의 시(詩)가 적혀 있었다.

“시인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옛 살림살이 닦고 또 닦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한 종지 눈물로 한 접시 그리움으로 한 사발 사랑으로 한 양푼 인심으로. 그림자처럼 따라와 시가 되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비움박물관: 만물이 시로 머무는 곳’, 작가는 이영화 비움박물관장(74)이었다. 이 관장은 이렇게 시를 통해 박물관에 전시된 민속품들을 의인화하고 시민들에게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 민속품 3만 점 가득한 비움박물관

현재 비움박물관 1층 전시실에서는 다음 달 28일까지 열리는 ‘뒤웅박이 된 할머니 이야기’라는 기획전시가 한창이었다. 전시실에 있는 다양한 바가지 200여 종이 각자의 쓰임새를 자랑하는 듯했다.

전시된 바가지는 농사에 쓸 두엄을 만들던 똥바가지, 물통으로 쓰였던 조롱박, 그림을 그려 장식품처럼 활용했던 그림바가지, 씨앗을 담던 뒤웅박 등이었다. 전시 주제가 된 뒤웅박은 씨앗을 보관하기 위해 꼭지 근처에 주먹만 한 구멍을 뚫고 속을 파내어 만들었다. 이 관장은 “뒤웅박은 추운 겨울을 이겨낸 사람들에게 희망과 생명을 전했다”고 말했다.

조롱박 위에는 조선시대 장터를 그려놓은 큰 동양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그림은 조선시대 후기 시장에 있던 백성 1000명이 그려져 있다. 그림 밑에는 그물이 물속에 쉽게 가라앉도록 하는 도자기, 돌 그물추 1000개가 놓여 천불(千佛)로 표현되고 있었다. 전시실 한쪽은 한겨울 농한기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았던 사랑방으로 꾸며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옥상으로 올라가자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옥상에는 술 도가니부터 간장, 고추장을 담은 장독이 가득했다. 4층에는 놋그릇, 삼신할머니 그림, 각종 밥상, 떡쌀 등이 오롯이 전시돼 있었다. 옛 여인네들이 쪽물을 들여 만든 무명베 이불들을 모아 무등산 형상으로 만든 대형 작품과 신랑, 신부가 잠을 잘 때 쓰던 원앙 베개 테두리를 모아놓은 족자는 옛날 평민들의 소원을 전해주고 있었다.

3층에는 농부의 주걱과 밥사발은 물론이고 베틀, 한지로 만든 창, 맷돌, 대나무 바구니 등이 흘러간 시간을 이겨내며 자태를 뽐냈다. 수백 개가 함께 전시된 흰색 밥사발들을 본 프랑스 예술가들은 “아름답다”며 감탄을 연발했다고 한다. 또 전남 담양군은 다양한 대나무 바구니들을 모아 박물관을 짓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2층에는 종이로 만든 그릇을 비롯해 벼루, 묵 등 문방사우와 대나무로 제작된 닭장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처럼 비움박물관은 관람객들에게 100년 전후에 쓰이던 각종 민속품 3만 점을 수장고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평범한 옛 사람들의 다양한 살림살이를 갖추고 있는 박물관은 비움박물관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정부나 자치단체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 광주의 유일한 사립박물관이다. 이 관장이 2016년 비움박물관을 연 사연이 궁금해졌다.

○ 민속품 수집에 바친 50년

이 관장은 전북 순창군 풍산면 교장 집의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시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1960년대 광주로 유학을 와 살레시오여중고를 졸업했다. 1973년 결혼해 전남 곡성군 겸면 시댁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시부모는 며느리 신혼살림을 위해 쓰던 그릇들을 버리고 플라스틱 제품으로 바꿨다.

이 관장은 우연히 버려진 시증조부의 담뱃대, 안경집 등을 장롱에 넣어뒀다.

“가난한 시대가 지나고 경제성장을 해 한국 문화가 일어나면 이런 저력이 어디서 나왔을까 하며 궁금해하고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 관장은 이런 생각으로 10여 년 동안 주변에서 버려진 생활도구를 모았다. 사업을 하는 남편을 따라 광주에서 가정집 셋방살이로 시동생 3명, 자녀 3명을 키우면서도 의식주가 깃든 옛 살림살이를 모으는 것을 쉬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는 광주 동구 예술의 거리 개미시장에서 옛 살림살이를 수집했다. 시간이 흘러 버려진 옛 살림살이가 민속품이 됐다. 민속품을 수집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화장품을 사본 적이 없다. 동창끼리 여행을 가보거나 옷을 구입한 적도 거의 없다. 화장을 하거나 예쁜 옷으로 치장하는 대신 민속품을 모으는 데 열정을 쏟았다.

이 관장은 “쓸모없이 버려진 물건들을 소중하게 쓰다듬고 어루만져 왔다”며 “각종 민속품들이 비워져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여겨 박물관 이름을 비움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문화가 세계적 문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서민 삶의 한 부분이었던 옛 살림살이들이 여전히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서글픔도 밀려든다. “언젠가는 알아주겠지”라는 심정으로 옛 살림살이를 애정으로 다뤘다. 평생 한국 문화가 최고라는 자긍심과 광주에 대한 애향심이 비움박물관의 원동력이다. 박물관 관람료 1만 원도 이런 자긍심의 한 단편이라고 이 관장은 설명한다. 박물관을 열기 전에는 건물 3개를 빌려 민속품들을 보관했다. 민속품을 분류하는 데만 6년이 걸렸다. 자녀들이 엄마에게 힘을 보태 박물관 문을 열었다. 민속품을 각자 역할에 걸맞게 전시하기 위해 10개월 동안 목수 10명과 함께 일했다.

“국가와 지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청춘을 바쳐 민속품을 모았다. 한국 문화가 세계 문화의 중심이 돼 가고 있는 만큼 국가나 자치단체가 민속품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50년 가까이 문화지킴이이자 알림이로 살아온 이 관장은 한국 문화가 더 융성하기를 바라는 새해 소망을 이렇게 전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이영화#유산#애정#광주 비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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