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찡한 적송의 향기… 눈부신 노을은 네 붉은 상처 같구나

글·사진 태안=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입력 2021-10-23 03:00수정 2021-10-23 04:44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여행이야기]충남 태안 안면도
태안 바람길(해변길 7코스)에 있는 운여해변(고남면 장곡리)에서 본 솔숲 방조제의 해넘이 광경. 해질녘 사진동호인의 낙조 촬영지로 유명한 명소다.
《조선시대에 건설된 운하로 육지가 섬이 된 충남 태안군 안면도는 변형된 지형만큼이나 굴절 많은 역사를 안고 있다.안면송이라고 불리는 훌륭한 적송(赤松) 덕분에 고려와 조선 때는 섬 전체가 ‘왕실의 숲’으로 보호받았지만, 외국 침탈 시기에는 수탈의 대상이 됐다. 섬이 통째로 일본인에게 팔리는 일도 겪었다. 천혜의 관광 자원을 갖춘 안면도 가을 여행은 땅에 얽힌 역사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의 항공유 용도로 채취된 적송의 송진 상처.
태안 안면도자연휴양림에서 피톤치드 가득한 소나무 숲길을 거닐다가 상처 난 적송 한 그루를 만났다. 수령 100년 남짓, 반달곰의 표식처럼 나무 한 가운데 V자형 상처를 안고 있는 적송은 송진으로 간신히 상처를 봉합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다. 소나무를 칼자국처럼 난도질한 이는 누구였으며, 무슨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인 1927년 4월, 안면도는 단돈 82만3000원에 일본인에게 통째로 팔렸다. 당시 ‘신한민보’는 ‘8000명 사는 안면도 일인(日人) 부호에게 팔렸다’는 제목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의 안면도 국유림 매각 소식을 전하면서 “왜(일본)의 마생태길(麻生太吉·아소 다키치)이 이 섬의 왕이 됐다”고 개탄했다. 마생태길은 한국에 대한 망언을 일삼아온 일본 아소 다로 전 재무상의 증조부이고, 그가 운영한 마생상점(아소상점)은 강제징용으로 물의를 빚은 대표적인 전범기업 중 하나다.

태안 안면도자연휴양림의 적송 군락. 안면송은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돼 있다.
아소 다키치는 안면도를 사들인 뒤 안면도임업소를 설치했다. 품질이 뛰어난 안면송을 자신이 운영하는 탄광의 갱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적송 벌목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당시 안면도임업소 책임자 하야시 세이조(林省三)는 안면도를 자신의 왕국인 양 경영했다. 하야시 세이조는 특히 안면송에 톱날로 V자형 상처를 냄으로써 저렴하고도 손쉽게 송진을 다량으로 채취해내는 ‘신기술’을 개발했다. 90년 세월이 넘도록 안면송의 ‘고문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유다. 이렇게 채취된 송진은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의 항공용 송탄유(松炭油)로 제공됐다.

일제 치하 35년간 학대받아온 안면송은 원래 귀한 대접을 받던 품종이다. 위는 불그스레하고 아래는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잔가지 없이 하늘로 곧게 뻗어나간 안면송은 고려시대 이후 궁궐 혹은 군선 자재용, 황장목(黃腸木·왕실의 관을 짤 때 쓰는 나무) 등 특별한 용도에만 쓰였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도, 13년 전 서울의 불 탄 숭례문을 복원하는 데도 안면송은 건축 자재로 빠지지 않았다. 안면송은 국가의 중대사와 함께하는 소나무였던 셈이다.

주요기사
현재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된 안면송을 품고 있는 안면도자연휴양림은 수령 100년 내외의 소나무 천연림이 집단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산자락에 배치한 숲속의 집(18동), 산림휴양관 등에서 묵어갈 수 있는데 예약 경쟁이 치열한 편이다. 휴양림과 함께 그 건너편의 안면도수목원도 둘러볼 만하다. 이곳 전망대에 올라가면 소나무들에서 뿜어 나오는 솔향기와 함께 서해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몸과 마음이 맑아짐을 느끼게 된다.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사는 마을

조선시대에 사람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던 ‘왕실의 숲’ 안면도는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살 수 있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풍요로웠다. 나무 하나만 잘 다루어도 먹고살 만한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스며들 듯 하나둘씩 찾아왔다.

안면도가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땅이라는 뚜렷한 증거도 있다. 바로 고남면 패총(조개무지)이다. 패총은 옛 사람들이 바닷가나 강가에서 조개를 채집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여 있는 것을 말한다. 패총에서는 옛 사람들이 쓰던 토기와 석기 등 유물들이 많이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으로 간주된다.

거기에 더해 한반도의 선주민들이 땅을 고르는 안목도 살펴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역을 찾아낸 후,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다고 판단한 터에 생활 근거지를 마련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움집, 고인돌 무덤 등이 거의 대부분 풍수적으로 명당 터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안면도 고남면 일대에서는 10여 개의 패총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신석기 시대에 사용한 패총 위에 청동기시대의 패총이 겹치는 곳도 있었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었다는 뜻이다. 현재 서해 갯벌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고남패총박물관(고남면 안면대로 4270-6)에서는 이곳 패총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어린이를 동반한 관광객들이 체험전시실, 체험학습실 등에서 선사시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다.

○가을바다 여행의 백미, 안면도 바람길

태안 바람길(총 16km)의 시종점인 안면도 최남단 영목항. 안면도에서 원산도(보령시)를 잇는 원산안면대교가 보인다.
소나무와 패총으로 이어지는 안면도 ‘땅의 역사’ 길목은 가을 정취를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해변길 코스로도 연결된다. 고남패총박물관 바로 남쪽에 있는 영목항(안면도 최남단)에서부터 해변을 따라 북상해 황포항까지 이어지는 16km 길은 ‘바람길(태안 해변길 7코스)’로 불린다. 걸어서는 5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체로 길이 평탄해서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이곳에는 운여해변, 바람아래해변 등이 독특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낸다. ‘운여(雲礖)’는 앞바다가 넓게 트여 파도가 높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의 포말이 마치 구름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변길을 따라 해송이 내뿜는 솔향기를 맡으며 지극히 고운 규사로 구성된 백사장, 물고기를 잡는 독살, 해안사구 등 자연 그대로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운여해변은 멋진 일몰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일몰 때가 되면 한적하던 해변이 다소 번잡스러워진다. 낙조를 촬영하기 위해 때맞춰 사진 동호인들이 한꺼번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바람아래해변은 마치 사막과 같은 모래언덕 아래로 바람도 비켜간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다양한 생물종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 해루질로 유명하다.

○가을꽃 명소로 꼽히는 태안

태안 꽃지해수욕장의 코리아플라워파크에 만개한 가을꽃 축제.
안면도국제꽃박람회 등 꽃동네로 널리 알려진 태안은 현재 가을꽃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과거 꽃박람회가 열렸던 꽃지해수욕장의 코리아플라워파크(안면읍 꽃지해안로 400)에서는 안젤로니아, 천일홍, 코키아 등 다양한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중 안젤로니아 꽃밭에는 명화 속 인물들이 조형물로 설치돼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태안 청산수목원 내 흰 솜털 같은 꽃을 피운 팜파스그라스.
안면도 북쪽 남면에 있는 청산수목원은 황금삼나무길, 메타세쿼이아길, 낙우송길 등을 따라 다양한 꽃들과 나무, 수생식물종이 배치돼 있다.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산책하듯이 걷기에 좋다. 특히 황금삼나무길은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촬영지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현재 이곳 수목원에서는 가을을 맞아 팜파스그라스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나라 억새보다 키가 크고 흰 솜털처럼 생긴 꽃이 인상적인 팜파스그라스는 남미 초원지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인데, 이국적인 분위기로 인기몰이 중이다. 또 핑크뮬리도 만개해 주변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미국에서 들여온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몽환적인 색깔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태안은 지금 대하와 꽃게가 제철이다. 대하구이와 꽃게탕 등으로 가을의 또 다른 포만감을 맛볼 수 있다.




글·사진 태안=안영배 기자·풍수학박사 ojong@donga.com
#적송#충남#태안#안면도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