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 약식 기록지 ‘땅표’… 상상력으로 경기 ‘복기’하는 재미 쏠쏠

황규인 기자 입력 2021-06-05 03:00수정 2021-06-05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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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도입 타석별 기록지
문자중계-동영상에 밀려나지만, 표 한 장으로 경기파악 가능해
첨단IT시대에도 살아남기를…
지난해 한국시리즈 땅표(부분).
1871년 5월 4일 미국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에 있는 케키옹가 볼그라운드에서 메이저리그 사상 첫 경기가 열렸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방문팀 클리블랜드 포리스트 시티스 1번 타자 디컨 화이트가 2루타를 치고 나갔다. 그러나 다음 타자 진 킴볼이 2루수 직선타로 물러나는 사이 화이트가 2루 복귀에 실패하면서 순식간에 아웃 카운트 2개가 올라갔다. 안방팀 포트웨인 케키옹가스 2루수 톰 캐리가 직접 베이스를 밟아 아웃 카운트 2개를 모두 책임졌다.

이 경기는 결국 포트웨인의 2-0 승리로 끝났다. 결승점은 2회말에 나왔다. 선두 타자로 나온 5번 타자 빌 레넌이 2루타를 쳤다. 다음 두 타자는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2사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8번 타자 조 맥더모트가 레넌을 홈으로 불러들이는 적시타로 팀에 선취점을 안겼다. 포트웨인은 5회말 추가점을 뽑았고 이후 양 팀은 득점 없이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미 승부가 끝난 상황이었지만 포트웨인은 9회말에도 공격을 진행해 투수 땅볼 2개, 유격수 땅볼 1개를 남겼다.

150년 전에 열린 이 경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은 이제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경기 내용을 복기할 수 있는 건 당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공 하나하나를 모두 적은 ‘공식 기록’이 존재했던 건 아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퍼즐’을 짜 맞춰 경기 내용을 되살린 것. 그 덕에 이제 우리는 이날 각 타석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두 알게 됐다. 야구 역사학자들이 이렇게 경기 복원에 공을 들인 덕분에 메이저리그 ‘1호 경기’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날의 생생한 현장을 되돌릴 수 있다.

만약 당시 메이저리그에 ‘땅표’가 있었다면 고생이 덜했을지 모른다. 땅표는 고 이종남 기자(1953∼2006)가 ‘박스 스코어’를 토대로 1980년대에 고안한 약식 기록지다. 메이저리그에서 쓰는 박스 스코어는 어떤 타자가 몇 타수 몇 안타를 쳤는지는 알려주지만 몇 번째 타석에서 어떤 안타를 쳤는지까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땅표는 타석별 기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보다 입체적으로 경기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까지도 신문에 나온 땅표를 보고 전날 경기 내용을 ‘상상’해 보는 야구팬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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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표가 처음 위기를 맞은 건 ‘인터넷 문자 중계’가 등장한 뒤였다. 땅표는 ‘타석’ 결과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주루 플레이 등은 공백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문자 중계는 이 빈틈을 훌륭하게 채웠다. 그래도 야구팬들은 여전히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멀쩡히 3루에 있던 응원팀 동점 주자가 갑자기 ‘객사’했을 때는 3루 주자가 잘못한 건지 아니면 타자가 스퀴즈 번트 사인을 놓쳐서 생긴 일인지 문자 중계만으로는 정확히 알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예 거의 모든 프로야구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다. 심지어 생중계 시청 도중에도 이전 득점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경기장 곳곳에 자리 잡은 TV 중계 카메라가 360도 회전 기술을 선보이는 건 물론이고 투·타구 정보까지 꼼꼼하게 측정해 알려준다. 예전에는 야구를 천체 망원경으로 관측해야 했다면 이제는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그러면서 점점 땅표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야구팬이 가장 많이 찾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새 시즌을 맞아 서비스 개편을 진행하면서 땅표 서비스를 없앴다. 이제 땅표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스포츠동아 지면과 한국야구위원회(KBO) 홈페이지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정보 이용료’라는 명목으로 야구팬들 호주머니를 털어가던 ‘○○○ 전화 서비스’(실시간 야구 스코어 제공)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머잖아 땅표도 아예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한 장의 표’만으로도 야구 경기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땅표뿐이다. 문자 중계는 이닝별 경기 결과를 일일이 훑어야 하고 동영상으로 결과를 확인할 때도 실시간으로 기다려야 한다. 땅표의 존재 가치를 긍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유비쿼터스 시대’에도 땅표를 조금 더 많은 곳에서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못 찾겠다, 꾀꼬리, 땅표 들고 나와라!

P.S. 땅표가 ‘땅표’로 불리게 된 이유는 야구에서 땅볼이 그만큼 흔하기 때문이다. 땅표에서는 1루 땅볼은 ‘1땅’, 유격수 앞 땅볼은 ‘유땅’ 등으로 표기한다. 뜬공은 ‘날 비(飛)’를 쓴다. 중견수 뜬공은 ‘중비’가 되는 식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약식 기록지#야구#땅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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