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에 끌리고 한양도성에 푹… 푸른 눈의 한국문화 전도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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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마지막 평화봉사단원 오수잔나 씨
1980년 봉사왔다가 문화에 반해… 시골인심-민주화 열기 몸소 겪어
“조선백성 20만이 쌓은 도성 감탄”

한양도성 투어 해설가로 활동 중인 오수잔나 대성그룹 고문이 도성의 가장 오래된 문루인 창의문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위 사진). 1980년 평화봉사단 시절 경남 사천보건소 주최로 열린 공공보건 교육 프로그램에서 마을 주민들과 어울렸을 때 모습.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오수잔나 고문 제공
한양도성 투어 해설가로 활동 중인 오수잔나 대성그룹 고문이 도성의 가장 오래된 문루인 창의문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위 사진). 1980년 평화봉사단 시절 경남 사천보건소 주최로 열린 공공보건 교육 프로그램에서 마을 주민들과 어울렸을 때 모습.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오수잔나 고문 제공
“배 불리 얻어먹은 기억이 가장 많이 납니다.”

40여 년 전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오수잔나 대성그룹 고문(63)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그는 1980년 경남 사천보건소에 파견돼 결핵관리 요원으로 일했다. 한국이 막 근대화 작업을 마치고 ‘웬만큼 사는 나라’ 대열에 들어설 때였다.

“집집마다 방문해 결핵약을 나눠주는 일을 했습니다. 손님이 오면 한 상 뚝딱 차려주시는 것이 시골 인심이죠. 보건소로 돌아갈 때가 되면 언제나 배가 빵빵해져 있었습니다.”

한국의 정에 푹 빠져 2년 임기 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줄곧 한국에서 살고 있는 오 고문을 최근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서 만났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 당시 프런티어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시작된 평화봉사단은 한국에서 1980년 그의 기수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중단됐다. 조지타운대에서 미국학을 전공한 뒤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경력을 쌓기 위해 평화봉사단에 자원했다.

“한국 생활에 다 적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재래식 화장실은 ‘도전’이더군요. 그래서 언어 습득의 기회로 삼았죠. 한국말 메모장을 들고 쪼그리고 앉아 외웠더니 실력이 쑥쑥 늘었습니다. 다리는 저렸지만요. 하하.”

“제가 한국에서 많이 받는 질문은 ‘왜 잘사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미국은 한국보다 앞서지만 문화는 국가 간 순위를 매길 수 없습니다. 저는 한국 문화가 좋았습니다.”

임기 후 우연히 관람하게 된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에 감동을 받고 놀이패 사무실에 무작정 출근하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졸랐다. 제자는 되지 못했지만 10여 년 동안 무대 뒤에서 해외담당 매니저로 활동했다.

오 고문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980년대 초중반은 한국 사회에 민주화 열기가 가득한 때였다. 그 역시 최루탄을 뚫고 서울 신촌 대학가에 있는 놀이패 사무실에 오갔다. ‘굴레방 다리’로 불렸던 아현 고가도로가 자동차가 아닌 민주화 시위대로 인산인해가 된 모습도 목격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이뤄진다는 귀중한 ‘역사 공부’를 한국에서 하게 된 셈이죠.”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지만 이혼하는 아픔도 겪었다. 본명이 수잔나 샘스탁인 그는 당시 남편 성을 그대로 쓰고 있다. 자녀 2명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싱글 맘인 그는 아이들을 외국인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일반 한국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글로벌 시민교육은 수준급입니다. 굳이 외국인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지요.”

이후 남이섬 문화원장, 한국판 뉴스위크 편집위원 등을 거친 그는 외국인 모임에서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을 알게 되면서 그룹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세계에너지협회(WEC) 명예회장을 맡은 김 회장이 국제 무대에서 신재생 에너지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WEC 영국본부 등과 소통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오 고문은 아직도 평화봉사단을 매개로 한국과 미국을 이어주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소개된 ‘코로나19 생존 박스’ 스토리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지난해 한국 외교부 산하 국제교류재단은 역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마스크, 특산품 등을 넣은 ‘생존 박스’를 발송했다. 미국 쪽 평화봉사단 동문 모임인 ‘프렌즈 오브 코리아’에서도 활동하는 그는 자문 자격으로 단원 주소를 수소문하는 일에서부터 박스에 넣은 물품 선정에까지 관여했다.

“과거 미국이 한국을 도왔다면 이제는 한국이 미국을 도울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일이라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끝없는 한국문화 탐험가인 그는 요즘 한양도성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다. 2019년부터 주말에 짬을 내 한국청년연합(KYC)이 운영하는 한양도성 투어 프로그램의 유일한 외국인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어로 진행하는 해설가다.

“조선 태조때 국민 20만명이 힘을 합쳐 무거운 돌을 나르고 쌓아 100여일 만에 1차 완성된 것이 한양도성입니다. 기획력과 협력심이 한국인의 DNA에 숨쉬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사물놀이#한양도성#한국문화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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